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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의 헌릉(獻陵)

"저 무인석이 태종의 얼굴인가?"


▲ 헌릉 입구



태종이 잠든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大母山) 주변은 주소지는 서울이라지만 한적한 농촌 풍경이 펼쳐있었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은 산 모양이 할머니를 닮았다 하여 대고산(大姑山)이었으나 태종이 이곳에 오자 할머니 대신 어머니를 써서 대모산으로 바뀐다.

큰 도로에서 꺾어져 2차선 도로를 따라 헌릉(獻陵)으로 들어가는 길은 차 한 대 지나가지 않고 사람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는데 헌릉 입구에 난데없이 교통신호등이 등장한다. 헌릉 입구에서 왼쪽 넓은 대지 위에 자리잡은 국정원이 그 원인이리라.

헌인릉은 태종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仁陵)이 함께 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고 국가정보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노력은 알고 있지만 아직도 대다수 국민에게 국정원은 뭔가 겁나게 하는 기관이란 인식이 강하다. 과거 막강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모습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기에.

헌인릉 앞에 나타난 국정원 건물을 잠시 쳐다보다가, 태종이 보통 기가 센 왕이 아니었으니 이것도 태종과 국정원의 드센 풍수 궁합이 맞는 것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다 피식 웃고 말았다.


▲ 헌릉에는 무인석, 문인석, 석양, 석호, 장명등까지 망주석만 제외하고 보통 왕릉의 두 배에 해당하는 석물이 서 있다.

헌릉은 조선 제3대 태종(1367~1422)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쌍릉이다. 남한에 있는 왕릉 중 유일하게 문·무인석과 석양, 석호 등 석물이 다른 왕릉에 비해 두 배가 많다. 또 고려왕릉의 제도를 거의 답습했기에 능상이 매우 높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 오를 때 반쯤 등산을 하는 각오로 올라가듯 이곳도 능상으로 등정한다는 생각을 다지며 올라가야 한다.

대모산은 물이 많은 곳이다. 헌릉은 태종 재위 당시인 1415년 지관 이양달이 미리 잡아놨던 곳이고 1420년 원경왕후가 승하하자 이곳에 안장했다.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56세로 승하하자 세종은 헌릉 산역을 시작한다.


▲ 헌릉 잔디밭은 질퍽거리고 능상은 높다.

산릉 공사가 한창이던 8월 20일, 광(壙)을 여니 동쪽 모퉁이에서 물이 솟아오른다. 왕이 잠들 지엄한 땅에 물이 솟는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세종이 크게 놀라 부랴부랴 지신사 김익정(金益精)을 보내 살펴 보라 명한다. 김익정은 비로 말미암아 스며든 물이라 보고했고 그 물은 며칠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어쨌든 태종은 이곳에 남아있지만 나중에 곁에 잠들었던 세종은 수렴이 문제가 되어 여주로 천장했다. 물이 많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헌릉 정자각 앞 잔디는 비라도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물에 잠겨 죽는 일이 흔하다.

왕릉의 잔디는 주로 풍뎅이 유충 같은 해충의 해를 입어 말라죽는데 헌릉 잔디는 유독 물에 빠져 죽는 현상이 벌어진다. 궁여지책으로 도랑까지 파서 물길을 내놓았지만 정자각 지대가 워낙 낮은 곳에 있어 물이 빠지지 않는다. 그 옛날 능참봉과 능수복들도 능 관리하느라 고생 꽤나 했을 것이다.

답사하던 날 역시 잔디가 군데군데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인데도 반쯤 눈 녹은 물에 잠긴 잔디밭은 질퍽거렸다. 조선 초기 정자각의 특징대로 헌릉 정자각 역시 낮다.



두 개의 신도비

태종의 신도비는 두 개다. 하나는 세종이 세운 것이고 하나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고 글씨가 마모되자 숙종이 다시 세운 것이다.

세종은 '임금의 공덕은 역사에 기재되니 비석을 따로 세울 필요는 없지만 이미 건원릉에 세웠으니 이제 세우는 것도 옳다'고 했다. 문종부터 신도비가 없어져 현재 신도비가 남아있는 조선왕릉은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이다.


▲ 숙종이 세운 신도비

두 차례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의 카리스마는 숙종 때도 남아있었다. 숙종은 다시 신도비를 세우면서 "차마 구비를 묻지 못해 그냥 둔다"고 했다. 구비와 신비 두 개가 시대를 달리한 비석의 모양을 보여준다.


▲ 구 신도비의 왕(王)자 문양.
숙종이 세운 신비(新碑)가 약간 더 크지만 좌대로 앉은 거북이 등에 임금 왕(王)자를 잔뜩 새긴 구비(舊碑)가 훨씬 사실감이 강해 더 위엄이 있고 작품성도 뛰어나다.

구비의 용에는 원시적인 남성의 근육을 연상시키는 음각이 소름 끼치도록 살아있다. 두 신도비 모두 좌대부터 용을 새겨 씌운 이수까지 5m가 넘는 거대한 비석이다.

처남 넷을 죽이고 세종의 장인을 사형시키는 등 처가와 며느리 집안을 도륙하면서 외척의 힘을 꾹 눌러버린 태종은 세종이 펼칠 정사의 초석을 단단히 닦아놓았다.

관제 개혁을 해 왕권을 강화시키고 사병제도를 금했으며 군사제도 개편으로 국방을 강화했고, 조세제도를 정비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고려사'와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계미자라는 동활자를 주조하게 한 것도 태종이다.

태종은 조선의 기틀을 닦은 준비된 왕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었지만 강비 소생인 어린 방석에게 세자 책봉에서 밀려나고 공신으로 인정받지 못하자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 남성의 근육처럼 꿈틀거리는 용 문양

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하고 냉혹한 왕이라는 인식이 강해, 정작 불안정한 신생국 조선을 탄탄하게 반석에 올려놓은 뛰어난 정치역량을 발휘한 왕이라는 더 중요한 치적은 간과돼 왔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국가경영자의 정치력을 평가할 때 잣대를 어디에 두느냐를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태종의 역량을 무서워했던 정적들에게 끊임없이 제거당할 위기에 처했던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운 결과 승자로 남았을 뿐이다.

어쨌든 향후 200여년 간 조선이 태평성대로 안정된 시대를 이룬 것은 태종의 업적이다. 정치가 시끄럽고 지도자가 능력이 없으면 그 등쌀에 죽어나는 것은 백성이다. 태종의 평가 중 조선 백성이 평화로운 시대를 살게 해줬다는 것에 가장 큰 점수를 줘야 한다.

태종의 업적 중 하나가 골육상쟁을 벌이면서 쟁취했던 왕위를 52세에 스스로 미련없이 내놓고 세종에게 양위했다는 점이다. 52세라면 한창 경륜을 펼칠 원숙한 나이다.

후에 인조가 소현세자를 경계해서 죽인 일이나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일을 보자. 부자간에도 왕위를 놓고 살육이 오가는 것이 왕조국가 특유의 권력 생리다.


▲ 고집스럽게 태종에게 충성을 다하며 서 있는 무인석.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뒤 겨우 두 달 만에 왕위를 물려준 태종의 결단에서 세종을 국왕다운 국왕으로 만들겠다는 왕심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왕위에 집착하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내다본 넓은 안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집과 해학이 넘치는 무인석

능상의 석물 중 무인석이 먼저 들어온다. 고집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뚝심 있는 저 무인석과 문인석 등 석물은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박자청의 솜씨다.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축조한 김사량의 제자였던 박자청이 감독한 왕릉에서 그의 독특한 작품을 볼 수 있다. 현릉과 정종의 후릉, 이곳 헌릉의 석물은 한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쌍둥이처럼 모습이 닮았다.



▲ 석호와 석양

그렇다 해도 능상에 늘어선 석물을 보면 "과연 태종다운 능이로구나!" 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조선 최고의 카리스마를 지녔던 제왕의 모습을 이곳 아니라면 어디서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으랴.

형의 반란을 평정하고 주모자였던 박포의 목만 베고 형의 목숨은 살려주었던 일이나, 살아남은 고려의 왕(王)씨 후예를 죽이자는 청이 들어오자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왕씨의 후예를 죽인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생업(生業)에 안정하게 하라’ 명하는 태종에게는 승자로서 관대한 여유가 있었다.

여기 무인석에서도 태종의 여유가 엿보인다. 무인석의 얼굴은 분명 무시무시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은근슬쩍 흘러나오는 고집스러운 익살이 있다. 무인석을 가만히 들여다 볼수록 유쾌한 웃음이 비죽비죽 나온다. 제왕이라면 저런 여유와 배짱이 있어야지.


▲ 혼유석 받침돌도 5개 있다.

불교를 지독히 싫어했던 태종은 건원릉과 제릉(신의왕후 한씨)에는 아버지를 생각해 마지못해 원찰(왕릉 근처에 명복을 빌게 하던 절)을 세우게 했으나 자신의 능에는 "내 잠들 곳에 더러운 중들이 가까이 하게 할 수 없다"며 절대 세우지 말라 엄명했다.

원경왕후 재를 지내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명나라에서 부처를 신봉하므로 없앨 수는 없다면서 간소하게 축소해버렸다.

원경왕후 국상에 재를 올리자 "이제 들으니, 왕후의 재를 올릴 때, 대소 관원들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한데 섞여서 떠들어대어 거의 천 명이나 된다 하니, 부처에게 영이 없다면 몰라도, 만일 영이 있다면, 이런 일이 공경하여 섬기는 도리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것에서 태종이 단호한 성격의 현실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을 내려 왕과 왕비 이하 사대부와 서인에 이르기까지 수륙재(水陸齋)만 배설하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했으며 절에 나가는 인원도 일정한 수로 제한해버렸다.

'천년 후에 이 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저희에게 달렸다'고 토를 달았지만 이후 조선왕릉 제사에 절에서 개입할 여지를 봉쇄해버린 것은 태종이다.

고려말 불교의 타락상을 많이 보아왔던 태종은 '부처와 신선은 백성을 속이고 미혹하는 짓이라 허황하고 망령 된다'고 단정하고 사찰의 노비와 토지를 몰수해 유교국가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6백여 년 전, 고독했던 강한 군주 태종을 뒤로 두고 내려오는 언덕길은 가팔랐다. 가느다란 안개비가 내리는 흐릿한 이 겨울날, 인적 없는 넓은 헌릉의 구석구석에는 잔설이 남아있었고 국정원으로 들어가는 도로 너머에 있는 재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추운 방문객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전통 한옥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나지막하게 퍼져 나간다. 어머니가 저녁밥을 짓는 과거의 그리운 광경과 따뜻한 밥 냄새가 금방이라도 옆에서 흐르듯 정겨움이 와락 몰려왔다.


▲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재실 한옥이 정겹다.

물 많은 동네에 왔으면 물을 마셔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헌릉을 나와 대모산 물맛을 본다는 핑계로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는 재실 대문으로 들어섰다. 가끔 습기를 제거해주기 위해 군불을 땐다는 관리아저씨의 말이다. 바가지에 받아 한 모금 삼킨 대모산 물은 깨끗하면서도 맛이 강해 혀끝에 남았다.

조선왕릉을 찾는 묘미 중 하나는, 한옥의 향수를 재실 나무 마루에 앉아 음미하는 일이다. 핏줄 속에 흐르는 전통 유전자 코드를 편안하고 한가롭게 되짚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배우고 유적을 안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기와지붕의 곡선이 편안하고 수백 년 전 조상의 손끝에서 탄생한 석물이 어제 본 아저씨 얼굴처럼 낯익다는 것, 조상과 내가 공감대를 얻는 것, 이런 느낌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2006-03-19 12:1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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