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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삼국시대

4. 신라의 숨은 명장 이사부와 거칠부 장군. - 신라군의 기반을 닦다

2008/08/15 | ◆고성혁의 역사추적 

 

신라장군 이사부와 거칠부 장군 다시보기 - 그들은 신라 팽창의 앙상블
 

삼국시대 장군들을 여러분들은 몇 명이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이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장군 이름을 한번 말해 보라고 하면 금방 열명정도는 줄줄 왼다. 이름뿐만 아니라 그 장군들이 어떤 무기로 어떻게 싸워 이겼는지도 줄줄꾀고 있고 더러는 많이 알고 있슴을 자랑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화제를 바꾸어서 그러면 우리나라 삼국시대 장군이름을 한번 말해 보라고 하면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장군이름을 줄줄외던 것과는 달리 금방 막혀 버린다.

고작 말하는 것은 김유신 계백 을지문덕 연개소문 광개토대왕 화랑관창 이런식으로 답하는 것이 보통인데 광개토대왕이나 화랑관창은 장군이 아니니까 제외하고 나면 보통 5손가락도 못채우고 만다.

자주성을 소리높이 외치는 한국인들이 중국장군은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의 장군은 5손가락에도 다 못 꼽을 정도이니 이건 잘못되어도 한창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서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우리가 미쳐 알지 못했던 장군들이 무수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전투를 군사적 관점에서 곱씹어 보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이번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좀 더 많이 들추어 내어 우리가 소홀했던 장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관산성 전투와 연관된 장군들인데 알고보면 신라의 확장이 시체말로 고스톱해서 얻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신라의 숨어 있는 명장 이사부 장군 - 신라군의 기반을 닦다

관산성전투에 대해서 살펴보다가 새롭게 눈에 들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거칠부와 이사부였다.

이사부라고 하면 일반인들도 “어! 어디서 듣던 사람인데? 아 맞다. 신라장군 이사부” 이렇게 반응을 하게 된다. 유행가 가사를 통해서  귀에 익숙하게 된 이사부 장군이 바로 그사람이다.

“지증왕 13년  임자없는 섬이라고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 우리땅” 이라는 노랫말 가사로 통해서 이사부장군은 현재의 우리와 소통하고 있다.

또한 거칠부도 마찬가지다. 그냥 거칠부라고 하면 몰라도 “거칠부의 국사” 로 우리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을 뿐이고  그 이상은 시험에 안나오기 때문에 알지도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저 신라 진흥왕때 왕명으로 처음으로 그때까지의 신라역사를 기록하는 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관산성 전투에 대한 역사추적을 통해서 이사부와 거칠부가 그렇게 큰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두인물이 도대체 어느정도이길레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굳이 설명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두 주역이 김춘추와 김유신장군이라면 그보다 앞선 신라 진흥왕때 신라전성기를 연 두 주역이 바로 이사부장군과 거칠부 장군이다라고 비유하면 거의 딱 맞을 듯 싶다. 

거칠부의 국사를 편찬이라고 생각해서 거칠부가 조선시대 붓잡고 글만 쓰는 선비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거칠부는 삼국사기에서도 분명하게 김유신 장군 다음으로 그 비중을 높게 다룰만큼 열전편에 거칠부의 면모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특히 군사적 관점에서 볼때는 젊은 화랑 김유신이 닮고자 했던 모델이 거칠부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왜냐하면 김유신장군과 거칠부, 이사부의 군사작전 스타일이 빼다 박았다고 해도 될만큼 닮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승리하는 지휘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보전을 통한 지략으로 승리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똑같다. 기만과 우회기동을 통하여 적의 허를 찌르고 순식간에 적이 무너지게 하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투자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는 모습은 흡사 삼국지 제갈공명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한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관산성전투의 배후 지휘자  이사부장군과 거칠부 장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독도는 우리땅의 주역 이사부 장군

삼국사기 열전편에 기록된 이사부 장군

독도는 우리땅의 주인공 신라 이사부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고  필자가 왜 이사부장군을 관산성 전투의 배후 지휘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그 역사과정을 추적해 보자.

삼국사기 권44 열전 4편에 보면 이사부편과 거칠부편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사부장군은 신라 지증왕때부터 진흥왕때까지 활약하였고  진흥왕 15년 백제와 일대 격전을 벌였던 관산성 전투당시엔 신라의 병부령으로서 총 지휘를 하였다. 독도는 우리땅 이사부장군을 살아있는 역사로서 우리 가슴에 품어 보자. 그럴려면 그 열전편에 기록된 아사부장군의 기록을 그대로 적어본다.
 

<異斯夫 이사부>

[或云<苔宗>.]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 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獅子} ,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卽} 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乃} 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太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主{王} 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申{甲} 士(+一千) 戍之. 時, <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요, 나물왕의 4세 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의 권모를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혹은 가라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지증왕 13년 임진년에 그는 하슬라주(지금의 삼척)의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을 병합하려고 꾀하였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나 속임수로 항복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싸움배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 위협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 원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사부를 시켜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은 다음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대승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 열전편에 기록된 이사부장군에 대한 내용이다. 내용자체는 그리 많지 않으나 군사적으로 볼땐 그 속에 엄청나게 많은 비밀이 숨어 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유행가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이사부하면 울릉도인 우산국 병합이라는 것만을 기억할 텐데 사실은 진흥왕 11년때 고구려와 백제의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은 사실이 역사의 대변혁의 전주곡 역할을 하게 된다. 

처음 부분에 보면 이사부가 거도의 말놀이를 모방하여 가야를 속여서 빼앗았다고 나오는데 그 거도 이야기를 보충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거도(居道) 이야기 *

이 이야기는 초기신라때 가야 연맹국을 신라가 공격할 때 기만전술로서 싸워 이긴 거도에 대한 것으로써 삼국사기 열전에 올라와 있다. 삼국사기의 열전 거도편엔 다음과 같이 올라와 있다.

거도는 탈해 이사금 때 사람인데 그 성씨는 전해지지 않고 어디 사람인지도 모른다.

탈해 이사금때 벼슬이 간(干)에 이르렀는데 이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신라 국경에 이웃해 끼어 있어서 자못 나라에 걱정꺼리가 되었다. 거도는 변방의 관리가 되어서 몰래 그 나라들을 병탄할 마음을 품었다.

매년 한차례씩 장토(張吐)의 들에서 말떼를 모아 군사들로 하여금 말놀이(馬戱)를 즐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마숙(馬叔)이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신라가 늘 하는 행사라고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거도가 군사와 마필을 일으켜 불의에 쳐서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중에서 가장 후진적이었고 약했던 신라가 진흥왕때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상대로 동시에 성을 빼앗는데는 이사부장군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데 말놀이를 가장하여 적을 기만한다든가 고구려 백제 양군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양국의 성을 빼앗는다는 단편적 기록만으로도 이사부의 기회포착능력과 군사작전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배경엔 정보력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 한데 그 정보부분에서 거칠부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거칠부는 이사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이사부장군의 모습

지증왕6년(505년) 봄 2월, 왕이 직접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하였다. 군주라는 칭호는 이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부분이다.

실직이라 하면 지금의 삼척지역을 말하는데 당시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요충지로서 북방 말갈족이 동해안을 타고 신라로 침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에 대한 방어사령부였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고 할수 있다. 여기서 잠깐 실직주 사건을 알고 갈 필요가 있다.

451년 눌지왕때 하슬라성(지금의 강릉)의 성주인 삼직이 실직주벌판(현재의 삼척)에서 사냥을 즐기던 고구려 장수를 공격해서 죽인 사건인데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 장수왕이 대노하였고 신라 눌지왕은 고구려에게 사죄 사절을 파견하면서 수모를 겪었었다.

당시 실직주는 고구려의 신라 영토내 주둔지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광개토대왕시절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가 5만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왜를 물리치고 금관가야까지 정벌한 후 일부는 그대로 신라영토내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과정에서 당연히 고구려군은 신라군보다 우위를 점하였을 것이고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전쟁 후 50여년이 지난 시점인 눌지왕대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집권층내부에서 반고구려 정서가 싹트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 연장선에서 실직주 사건을 이해하면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해 준 400년으로부터 50여년이 지난 후 시점에서 고구려와 신라간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엿볼 수 있다.

어떻든 이사건 때 신라의 눌지왕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손이 발이 될 정도로 빌고 굴욕을 감내했어야 했다.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에도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상하 관계를 설명하는 기록이 있다.

이 실직주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고구려와는 전통적으로 적대관계였던 백제와는 가까워 지게 되었으니 나제동맹 형성의 단초는 실직주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후로도 고구려 장수왕은 수차례 실직주를 포함한 신라의 동해안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지만 지증왕 6년인 서기 505년엔 실직주는 완전한 신라의 영토가 되었는데 그 기록이 실직주에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다.  기록상으로는 임명이지만 이사부가 실직의 고구려군을 패퇴시켰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실체적 사실에 접근한다 하겠다.

이사부를 실직주 군주로 임명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이사부가 당시 동북아 최강인 고구려와 싸워 이겼슴을 뜻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사부는 고구려군 생리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아는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두말 할 필요 없이 신라내에서 이사부의 군사적 지위는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신라 경주 호우총에서 발굴된 고구려계 청동그릇.(국립중앙박물관 소장)
5세기 초반 신라왕가 무덤에서 발굴된 고구려계 유물로서 당시 고구려는 신라에 상당한 정치군사적 압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신라왕자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다.


광개토호태왕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그릇 밑면
5세기 초반 신라를 침략한 왜를 격퇴한 고구려는 신라에 주둔하면서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슴을 짐작케 해 주는 유물이다.


지증왕13년(512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 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이 기록이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랫말의 모체이다.

지증왕 13년에 이사부가 울릉도인 우산국을 귀속시켰다는 내용인데 이 기록을 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한다면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까지 정벌 할 수 있는 해상력을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그 당시 울릉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용으로 볼때 이사부는 단순하게 힘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기만하는 지략으로 제압하고 있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이사부가 해상력을 운용할 수 있기에 선박을 이용해서 동해안지역에 대한 군사적 기동이 용이할 수 있었고 이런 능력은 군사작전에서 지상병력과 해상병력을 함께 이용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확대해석까지 가능하게 한다.  그런 능력이 아사부가 실직주 군주로 임명된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라 지증왕 다음왕이 법흥왕(法興王)인데 재위기간 26년(514~540)동안 신라본기 법흥왕조엔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법흥왕 다음 왕인 진흥왕때 신라본기에 이사부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진흥왕 2년(541년) 봄 3월,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했다는 부분이다. 병부령은 법흥왕 4년(서기517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진흥왕 2년에 이사부는 병부령이 됨으로써 신라군의 총지휘관이 된 것이다.

이사부가 실직의 군주로 임명된 것이 지증왕 6년인 서기 505년인데 병부령으로 임명된 진흥왕 2년은 541년이다. 그렇다면 무려 36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때 이사부는 국가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갈랐던 관산성 전투는 진흥왕 15년인 서기 554년에 있었으니 응당 병부령인 이사부가 총 지휘를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된다.
 

진흥왕 6년(545년)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 기록이 고교시절 국사시간에  신라의 국사편찬 [거칠부의 국사]로 암기해야 했던 삼국사기의 바로 그 대목이다. 

여기서 보듯이 이사부가 건의하고 그 건의를 받아들여서 거칠부가 행하는 것이기에 직위상 거칠부는 이사부 밑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결정적 작전을 입안한 이사부 장군

진흥왕 11년(550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신라와 백제가 철천지 원수가 되는 단초가 된 기록이다.

금현성과 도살성은 현재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순 없지만 여러 정황상 보은의 삼년산성-옥천의 관산성-진천-이천-한강의 신주(이성산성,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중간의 어느지역으로 보여진다. 그만큼 금현성과 도살성은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인데 이에 대한 작전도 병부령 이사부가 지휘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14년인 서기 553년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어렵게 되찿았던 백제의 고토인 한강하류지역을 신라가 빼앗았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신라는 신주를 설치하고,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을 신주의 군주로 삼았으니 백제는 공격의 방향을 고구려에서 급속하게 신라로 향하게 된다. 

백제의 복수전인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 기록중엔 일본서기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일본서기 기록에 나온 내용은 삼국사기에선 신주의 군주 김무력군이 관산성전투에 합류하고 백제군을 물리친 것으로 나온다.

이런 신라군의 일련의 군사작전의 총지휘자는 당연지사 병부령 이사부이다. 따라서 이사부는 휘하에 김무력과 거칠부를 거느리고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질적 주역이었던 것이다.
 

화랑을 적극적으로 전투에 활용하기 시작한 이사부
 

진흥왕 23년(562년)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의 주민을 침탈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모반하였다.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이사부를 돕게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인솔하고 그 곳에 도착하니, 그들이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로를 평가하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왕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왕이 강력히 권하므로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사다함은 이들을 풀어주어 양민을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진흥왕 23년의 기록이 이사부가 나오는 마지막 기록이다. 특히 이 부분은 가야의 완전몰락을 그리고 있다.

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가야국중엔 최강국인 김해의 금관가야가 몰락했고 그 후 가야의 리더였던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당시 백제편에 서서 신라에 맞서다가 패함으로써 치명타를 입게 된다. 

그 관산성 전투이후 8년후인 진흥왕 23년엔 이사부가 지휘하는 화랑 사다함의 활약으로 대가야는 완전히 신라에 무릅꿇게 된다.

실직군주로서 처음 임명받은 지증왕 6년때인 서기 505년부터 지증왕 23년인 562년까지 무려 57년간을 일선에서 활약안 이사부는 신라를 군사적기반을 닦은 장군이었다.

이사부장군이 일선에서 활약하는 기간동안  굵직굵직한 군사적 사항을 요약해 보면

 * 강원도 강릉 삼척지방을 확실하게 신라영토로 확보
 * 병부령을 설치하여 군사지휘권의 일원화 확보
 * 한강하류 지역 확보
 * 관산성 전투에서의 신라군 총사령관으로서 신라 승리
 * 가야지역 신라 영토로 확보



★ 전략정보전의 선구자 - 거칠부 장군

흔히 신라의 장군하면 김유신장군 이사부장군 다음으로는 장군이 아닌 화랑들, 예로들면 화랑 관창, 사다함,  그리고 김유신장군의 아들  원술랑정도가 언뜻 떠오르고 만다. 

그래서 거칠부장군도 있다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 거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거칠부는 우리가 고등학교때 배운 국사책엔 진흥왕때 왕명을 받고 처음으로 국사(國史)를 편찬한 인물로만 그려져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거칠부는 오히려 군사적 식견이 매우 앞섰던 장군임이 군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여실히 증명된다.

특히 고구려에 대한 전략정보전문가로서 신라가 죽령 이북의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공방속에서 지금의 충청북도와 한강하류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를 차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던 장군이었다. 

그런 거칠부의 활약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삼국사기 열전편을 보면 김유신, 을지문덕 다음으로 거칠부가 소개되고 있다. 지금부터 거칠부에 대해서 군사적 관점에서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 관산성 전투에서의 그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석해 보자.


단양의 적성비 (이 비는 이사부(伊史夫)장군을 비롯한 여러 명의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고구려 지역이었던 적성을 공략하고 난 뒤, 그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也?次)와 가족 등 주변인물을 포상하고 적성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할 목적에서 세웠다.)


◈ 거칠부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居柒夫)전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或云<荒宗>.]姓金氏, <奈勿王>五世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 <居柒夫>少? 弛有遠志.

거칠부[혹은 황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로써 내물왕의 5세손이고, 조부는 잉숙 각간이요, 아버지는 물력 이찬이었다. 거칠부는 젊었을 때 건들거리며 방종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원대한 뜻도 품고 있었다.

거칠부(居柒夫)에 대한 첫 설명에 혹은 이렇게도 전한다고 하면서 말한 내용은 성은 김씨요 이름은 황종(荒宗)이라는 내용인데 쉽게 말해서 좌충우돌형의 거친놈이란 뜻이다. 

그 당시만 해도 신라인의 이름은 지금 우리들처럼 김아무개씩의 중국식 이름을 사용치 않았슴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즉 사람의 특성을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마 거칠부는 이름 그대로 거칠다는 것을 한자로 음이 비슷하게 거칠부(居柒夫)라 적은 것이다. 이것을 뜻글자인 한자로 표현하면 응당 황종(荒宗)이 되겠다. 

그다음 내용도 보면 거칠부가 어렸을때의 모습을 표현하는 모습에  少?이라고 적고 있는데 척(?)이라는 한자 뜻은 헤이하다, 방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 본다면 사춘기때까지는 좀 말썽부리고 제멋대로 행동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좋게 말한다면 기존의 가치관에 얾메이지 않고 틀을 깨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거칠부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 드라마화로 꾸며 보면

- 좌충우돌 거칠부 승려로 변신하다.

어떻든 이런 거칠부의 모습은 훗날 정세를 다각도로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힘을 키워주는 발판이 되었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는데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을 보면 그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이렇게 거친부분이 있다보니 좀 엉뚱한 부분도 거칠부에게는 있었던지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편엔 그의 이름소개 다음에 바로 이런 내용으로 전개되는데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거칠부 : (곰곰히 생각해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아. 젠장. 하긴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야? 내가봐도 한심스럽긴 해. 왕손인 주제에 맨날 이렇게 사고나 치고 사람들이 나보고 거친놈이라고 하는데 그러만도 하지 뭐. 한데 이거 좀 확 달라진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겠는데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신라안에선 해 볼 건 다 해봐서 따분하기도 하고  아 답답해 죽겠네.

그때 마침 절에서 종의 소리가 들리면서 스님들의 불경소리가 고즈넉하게 거칠부의 귓가에 메아리 친다.

거칠부 : (순간 느낌이 온 표정으로) 앗싸. 바로 이거야. 요즘 좀 배운티 내려면 불경하나쯤은 읊어야 명함이라도 내밀지. 그럼 나도 이 참에 머리깍고 이미지좀 개선시켜 볼까? 또 하나 더 있지. 흐흐흐 중이 되면 사방을 맘대로 돌아 다닐 수 있잖아. 신라 장안은 너무 좀았는데 잘 됐다. 

거칠부는 그 생각이 들자 바로 머릴 깍고 중이 된다. 그리고 사방을 유람하여 다니다가 언뜻 생각난 것이 고구려까지도 맘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음을 깨닫았다.

거칠부 : 신라 왕손으로서 뭔가 나라에 이득되는 일 하나정도는 하려고 그랬는데 이번에 고구려에 가서 고구려 사정좀 알고 와야겠다. 머리 깍기를 잘 했는데. 하하. 그러면 가까운데로 먼저 가볼까?

그 길로 거칠부는 고구려 땅인 죽령을 넘어서게 된다.

거칠부 : (저자거리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서 기웃기웃하며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

시장사람1 : 자네 그 이야기 들었는가?

시장사람2 : 무슨 말 말인가?

시장사람1 : 고승인 혜량법사가 이번에 법당을 하나 열었다는데 그 설법이 그렇게 좋다는 얘기 말이야.

시장사람2 : 그걸 이제 알았어? 설법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면 한 눈에 알아본다네 그려.

시장사람3 : 아 그 이야기 나도 들었구먼. 소문이 아주 자자하던데.

시장사람1 : 그렇게 유명한가 보지? 도대체 어느정도길레 그런단 말이여?

시장사람2 : 그러니까  말이여.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얼굴 한번 딱 보면 그 사람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다 맞쳐준다는 구먼.

시장사람1 : 아니 그정도야?  앞날까지 알려준다고?

시장사람3 : 그러니까 고승이지, 달리 고승이라 하겠는가? 이사람아.

거칠부 ; (시장사람들이 나누는 말을 듣다가 슬쩍 끼어든다.) 말씀좀 엽줍겠소이다. 그 법사가 혜량법사라 하였소이까?

시장사람2 : (거칠부를 힐끗 보다가) 그렀소만? (아래위를 흟어보면서) 그런데 보아하니 스님같은데 그 고승 혜량법사를 몰랐단 말이요?

거칠부 : (약간 당황하듯 머뭇하다가)  아. 저도 객지에서 혜량법사의 높으신 말씀을 듣고자 이렇게 찿아온 것입니다.   혹시 그 법당 가는 길좀 알려 줄 수 있겠소이까?

시장사람 3 : (시장사람2를 쳐다보며) 아니 이사람아. 뭘 그리 아래위를 훓으면서 타박하듯이 말하는가 말이여?  법사님 소문을 듣고 찿와 왔다 하지 않는가?

거칠부 : 약간 몸 둘바를 몰라하는 표정을 짓는다.

시장사람 1 : (거칠부의 모습을 보면서 안스러운듯 길을 일러준다) 스님 너무 상념치 마시죠. 이사람들이 시장바닥에서 굴러먹다 보니 좀 그렇다 생각하시고  ...  (손짓을 하면서 말한다) 그 법당은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보일겁니다.

거칠부 : (합장하면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마침내 혜량법사와 대면하게 되는 거칠부

혜량법사 : (거칠부를 지긋하게 보면서 나즉히 말한다) 사미(沙彌)는 어디서 왔는고?

거칠부 : (주위를 한번 슬쩍 훓어 보고 조용히 답한다) 저는 신라사람이옵니다.

혜량법사 : (시선을 바닥으로 한 체 고개를 약간 끄덕이면서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 알겠느니라. 물러가 있거라.

저녁 공양을 마치고 혜량법사는 거칠부를 조용하게 다시 부른다. 법당안에는 불상앞에서 하늘 거리는 촛불 2개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거칠부는 부처님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있는 혜량법사 뒤에 조용히 꿇어 앉는다.

혜량법사 : (거칠부가 왔음을 알고서도 잠시동안 명상을 지속한다)

거칠부 : (혜량법사 뒤에서 숨을 죽인체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혜량법사 : (잠자리에 들시간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들리자 혜량법사는 그때서야 돌아 앉으면서 거칠부를 한동안 말없이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연다) 신라에서 왔다고 했지?

거칠부 :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하옵니다. 법사님.

헤량법사 :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다 ) 내가 지금까지 겪어본 사람이 숫하게 많거늘 오늘 그대를 보아하니 정녕 보통사람은 아닌것이 분명한데 여기에 온 뜻은 다른데 있지 않더냐?

거칠부 : ( 자세를 고쳐 앉으며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말한다 ) 법사님 저는 구석진 곳에서 태어나 자라는 바람에 법사님의 높으신 덕망과 명성을 듣고 여기까지 멀다 않고 찿아 왔사옵니다. 부디 저를 물리치지 마시고 저의 무지몽매함을 일깨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옵니다. 법사님.

혜량법사 :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들어 보거라.

거칠부 : (고개를 들고 혜량법사를 쳐다본다.)

혜량법사 : (촛불에 비치는 거칠부의 눈을 보면서 말한다) 무얼 속이려 드느냐. 이 늙은 중놈의 눈에도 훤히 보이거늘. 아무리 이 나라가 좁다하더라도 그대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조차 없다고 보느냐? 

거칠부 : (고개를 떨구고 아무말이 없다.)

혜량법사 : (거칠부의 손을 지긋히 잡으면서) 내 그대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잡힐까봐 걱정되어서 몰래 알려주는 것이니 그대 나라 신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거칠부 : (조용히) 알겠사옵니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 한다)

혜량법사 : (나가려는 거칠부를 다시 불러서 앉힌다) 나를 보려고 여기까지 온 사람에게 매정하게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부처님의 도리가 아닌바 내가 자네의 관상을 좀 보아주겠네.

거칠부 : 혜량법사를 쳐다본다

혜량법사 : 제비턱에 매의 눈이로구나. 그대는 장차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될 상이야. 

거칠부 : 그러하옵니까?  지금까지 사고만 쳐서 속죄하고자 머리를 깍았을 따름이옵니다만.

혜량법사 : (고개를 가로 저으며 미소를 지으면서) 허허. 그런게냐? 아무튼 그대는 분명히 훌륭한 장수가 될게다. 이번엔 내 부탁하나 들어 주겠는가?

거칠부 :(깜짝 놀라며) 무엇이옵니까  법사님?

혜량법사 : 만약 그대가 나중에 장수가 되어서 군사를 이끌고 여길 다시 오더라도 말일세 그때는 나를 헤치지 말아 주겟는가?

거칠부 : (눈을 크게 뜨면서) 그렇게만 된다면 이르다 뿐이겟습니까? 제가 법사님을 해하다니요. 절대로 그럴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하늘에 해를 두고 맹세할 수 있사옵니다. 법사님.

혜량법사 : (눈을 지긋이 감으며) 그래 이만 돌아가 보거라.  아미타불.

거칠부 : (공손히 합장을 하면서  법당을 빠져 나온다)  


거칠부가 승려가 된 속내는?

이 내용이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편에 나오는 내용을 극화한 것인데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군사적 것은 거칠부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 이곳저곳을 승려 복장으로 다니면서 고구려 변방의 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시대엔 승려신분이라는 것은 승려이외에  첩자로서의 기능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서에 기술된 대표적인 승려첩자로는 고구려 장수왕의 명을 받고 백제로 넘어와서 개로왕으로 하여금 실정을 하게끔 유도하였던 도림이 대표적이다. 

잠시 언급한다면 승려첩자 도림은 백제개로왕이 바둑을 즐겨한다는 것을 알고 바둑으로 개로왕에 접근하여 개로왕과 백제신하들간에 이간질을 하고 백제의 기밀을 장수왕에게 알려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백제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아차산밑에서 참수당할 때 고구려첩자 승려 도림의 꾐에 빠진 것을 한탄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거칠부의 이런 기록 역시 거칠부의 고구려에 대한 정탐활동임을 말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거칠부의 대담한 활동은 어렸을 적 성격과도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거칠부의 고구려에 대한 정탐활동은 신라가 고구려를 공략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판단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삼국사기엔 고구려땅에서 혜량법사와의 만남 이후의 거칠부 행적을 이렇게 이어나가고 있다. 
 
거칠부는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 승려 생활을 그만두고 벼슬에 종사해, 관품이 대아찬에 이르렀다. 진흥왕 6년 을축년(545)에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들을 모아 국사를 편찬하였으며 관품이 파진찬으로 올랐다.

이 기록이 국사책에 신라 역사서 최초기록한 거칠부의 국사로 알려지게 되는 부분인데 이내용의 이면에는 거칠부가 승려생활을 통해서 그만큼 글을 많이 접하게 됨으로써 국사를 편찬하는 장(長)에 임명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 기록은 고구려땅, 현재의 죽령이북으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데 거칠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알려주고 있다.  그 기록은 이렇다.

진흥왕 12년(551) 왕이 거칠부를 비롯해서 대각찬 구진, 각찬 비대, 잡찬 탐지, 잡찬 비서파진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대아찬 비차부, 아찬 미진부 등  8명의 장군에게 명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게 아혔다. 백제사람들이 먼저 평양을 쳐부수자 거칠부 등이 승세를 타고 죽령 바깥쪽 고현 안쪽의 10개군을 빼앗았다.

이 기록이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이 손잡고 고구려를 협공하는 내용인데 백제의 숙원인 옛 한성백제의 옛땅인 한강유역은 백제가 공략하고 소백산맥 너머 죽령이북땅인 한강상류지역은 신라가 공략한 것을 말한다. 이때 신라군을 이끈 장군이 거칠부임을 밝히고 있다. 
  

고구려 승려 혜량법사는 신라 거칠부에게 포섭된 신라의 세작 아닐까? 

그리고 이어서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편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거칠부가 장군이 되어 오자 혜량법사가 그의 문도들을 이끌거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사예법으로 절을 하고  법사에게 나와 말했다.

“지난날 유학하던 시절에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만나게 되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러자 혜량법사가 답하기를

“지금 우리나라 고구려는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 않았으니 귀국 신라로 데려가 주면 좋겠구려”

이에 거칠부가 말에 함께 올라 돌아와서 왕에게 배알시켰다.

왕은 그를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 및 팔관법을 두게 하였다.  진지왕 원년(576) 상대등이 되어 군사와 정치의 사무를 맡아 수행했으며, 늙어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혜량법사가 말한 내용중에 지금 고구려는 나라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 내용은 당시 고구려가 지도부 내분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내부갈등을 겪고 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당시 고구려는 왕비 세력간에 세자책봉문제를 두고 유혈충돌이 벌어져서 약 2,000여명이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거칠부의 행동을 군사적으로 재해석 하면 어떻게 될까? 

어느정도의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어차피 전쟁은 군사적 관점에서 재해석 하는 것이 설화적 내용보다 더 설득력 있을 것이기에 군사적 요소에 주안점을 두고 재구성 해보자.

삼국시대 진흥왕 시점은 불교가 지배층 중심으로 형성되던 시기이다. 서역이나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는데 불교가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되는데 군사적 부분에선 승려는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승려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만큼 그 시기엔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이는 그만큼 인적자원에 대한 접촉기회가 많아짐을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거칠부가 승려가 되는 이유를 앞서 거론하였는데 눈을 돌려서  고승이라고 추앙받는 혜량법사는 과연 법사로서만 그 존재가치를 봐애 하는가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점에 대해서 필자는 혜량은 고구려의 고급정보를 거칠부에게 전달해 주는 세작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 승려 혜량이 거칠부에 포섭된 신라 세작이라는 관점하에서 그 실제 모습을 그려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 고구려 내부의 정보를 혜량으로부터 받은 거칠부는 대 고구려 작전에서 과감한 결단을 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 근본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고구려땅을 점령하고 혜량법사를 다시 만난 거칠부 

“지금 우리나라 고구려는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 않았으니 귀국 신라로 데려가 주면 좋겠구려”

라고 말한 부분을 달리 해석해 보면 고구려 정세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주는 세작의 기능을 언급한 부분이 되고 귀국 신라로 데려가 달라는 것은 어지러운 고구려를 피해서 신라로 간다는 의미보다 고구려인으로서 신라의 세작노릇을 충분히 수행하고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고구려땅에 산다는 것은 위험하니 신라땅에서 살고싶다고 보는 것이 군사적 관점에선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말해서 거칠부가 고구려의 고승 혜량법사를 찿아간 이유는 혜량법사를 신라의 세작으로 포섭하기 위한 것고 결과적으로 고구려 혜량법사는 신라의 세작이 되었다라고 보는 것이 군사적 관점에서 다른각도로 보면 어떻게 될까?


* 거칠부와 혜량법사의 관계를 다른 각도로 보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거칠부 : (사방 팔방 유람하며 다니던 거칠부  저자거리에서 이리기웃 저리기웃하고 있다) 

시장사람1 : 자네 그 이야기 들었는가?

시장사람2 : 무슨 말 말인가?

시장사람1 : 고승인 혜량법사가 이번에  법당을 하나 열었다는데 그 설법이 그렇게 좋다는 얘기 말이야.

시장사람2 : 그걸 이제 알았어? 설법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면 한 눈에 알아본다네 그려.

시장사람3 : 아 그 이야기 나도 들었구먼. 소문이 아주 자자하던데.

시장사람1 : 그렇게 유명한가 보지? 도대체 어느정도길레 그런단 말이여?

시장사람2 : 그러니까  말이여.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얼굴 한번 딱 보면 그 사람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다 맞쳐준다는 구먼.

시장사람1 : 아니 그정도야?  앞날까지 알려준다고?

시장사람3 : 그러니까 고승이지 달리 고승이라 하겠는가? 이사람아.

거칠부 : (슬쩍 끼어든다) 듣자 하니 고승이라고 하는데 그런 고승이 언제부터 있었소이까?

시장사람3 : 그걸 몰랐단 말이요? 

시장사람2 : (거칠부를 보며) 허허. 이사람 진짝 귀 막고 살았나 보구려

시장사람1 : (거칠부를 보며) 아니 지금껏 말한 것도 못들었소? 그 고승은 워낙 불력이 높아서 처음보는 사람도 척 보면 훤히 다 안다고 하잖소?

거칠부 : 그럼 그 고승에게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시장사람 2: (거칠부를 아래위로 훓어보며) 왜 중이라고 되려고 그러요? 불법 배우려면 중이 되면 되지 (주위사람을 힐끗 보면서 큰소리로 웃으며) 안 그렇소. 하하하.

거칠부는 저자거리 사람들 말을 듣고 고구려 승려를 만나면 고구려 정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승려처럼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고 죽령넘어 고구려 땅 혜량 법사를 만나러 간다.

거칠부 : (혜량법사 앞에서 합장하며 공손하게 말한다) 법사님의 높으신 명성을 듣고 이렇게 도리를 깨우치고자 먼길을 마다 않고 찿아왔사오니 부디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혜량법사 : (거칠부의 모습을 보고 바로 승려가 아님을 간파한다) 보아하니 승려는 아닌것 같고 관상을 보아 하니 제비턱에 매의 눈처럼 매서운 눈매를 가졌구려. 필시 장수의 위풍이 느껴지는 듯 하오이다. 자. 말씀해 보시구려. 솔직히 어디서 왔소이까? 내 비록 하찮은 중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보고 중인지 아닌지 만큼은 아는 능력이 있소이다.

거칠부 : (순간 놀란다)

혜량법사 : (거칠부가 순간 놀라는 것을 보고) 한번 말해 보시요. 뭐 때문에 나를 찿아 오셨소이까?

거칠부 : (혜량법사를 잠시 쳐다보다가 혜량법사에게 바짝 다가서서 ) 맞습니다. 법사님께서 보신대로 전 신라사람입니다. 고구려에서 이름있는 스님이 여기까지 오셨다는 말을 듣고 솔직히 고구려 조정 돌아가는 정세좀 알려고 찿아왔사옵니다. 허락하신다면 좀 알려 주시면 고맙겠사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망나니처럼 살아왔사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 살아선 안되겟다 싶고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은 생각에 법사님을 뵈로 온 것입니다.

혜량법사 : (크게 한숨을 내시며 탄식하듯이 말한다) 고구려 조정의 정세가 알고 싶다라. 허허. 사실 지금 고구려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외다.

거칠부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혜량법사 : 왕비세력간에 세자책봉문제로 완전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오

거칠부 : 싸움이라구요? 도대체 얼마나 크길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라고 하십니까?

혜량법사 : 서로 지지하는 왕비가 다른 귀족들간에 싸움으로까지 번져서 2천명이 죽었으니 오죽하겠소?

거칠부 :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래서 이곳 변방까지 내려오신 겁니까?

혜량법사 : (또 한번의 탄식을 하며 ) 그러 하오이다. 살륙이 난무하는 고구려 땅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오이다.

거칠부 :  (혜량법사의 두손을 꼬옥 잡으며 ) 법사님. 그러면 신라땅에서 법사님의 뜻을 펼쳐봄이 어떠하시겠습니까?

혜량법사 : 그게 무슨 말씀이요?

거칠부 : 사실 우리 신라는 지금 죽령밖 고구려땅을 도모할 계획을 갖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온데 법사님께서 조그만 도움좀 주시면 신라땅에서 법사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사옵니다.

혜량법사 :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어렵게 입을 뗀다) 이 노승이 무었을 도와드리면 좋겠소이까?

거칠부 : 법사님께서 고구려 정세를 저에게 정확히 알려주시면 됩니다. 군사이동이라든가 조정의 분위기 그리고 병력배치라든가  말입니다. 특히 이곳 죽령밖 고구려군의 동태가 제일 중요합니다.

혜량법사 : 그렇게 하겠소이다.
 

군사적 관점에선 이것이 본 모습 아니겠는가 하고 극화해 보았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신라가 죽령밖 고구려땅을 획득하고 나서의 모습도 보면

" 거칠부가 혜량법사와 함께 말을 타고 돌아와서 왕에게 배알시켰다. 왕은 그를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 및 팔관법을 두게 하였다."

라고 적고 있듯이 혜량법사는 신라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것으로 보아 혜량은 거칠부에게 포섭된 세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거칠부의 정확한 정보 - 관산성 전투 승리의 밑거름이 되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진흥왕 11년조 기록을 다시 보도록 하자.

진흥왕 11년(54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서로 주고받고 하는 사이에 그 틈을 노려서 신라가 두 나라를 상대로 이런 과감한 작전을 펼치는 데에는 실질적으로 거칠부의 고구려에 대한 정보가 주효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엔 이사부가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사부는 진흥왕 2년에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에 임명되고 나이로 보자면 연로한 고령이다. 따라서 야전 지휘관역할은 열전 거칠부편에도 나와 있듯이 거칠부가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죽령에서 한강하류 지금의 이천쪽으로 연결되는 중간 거점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거칠부는 어려서 좌충우돌하던 성격이 오히려 과단성 있는 자질로 변화되고 이것은 군사적 결단성으로 연결되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고구려에 대한 거칠부의 정확한 정보력은 신라가 백제보다 앞서서 과감한 작전을 결행하게 한 원동력임을 확인시켜 주는 결과라 보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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