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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삼국시대

해상왕 장보고

출처 : 역사의 천존고

해상왕 장보고 1 - 모험의 시작

장보고,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오늘날의 전라남도 완도인 청해진을 본거지로 삼았다는 점과, 문성왕 시절 그가 섬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완도 출신임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또 출생연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지만, 역사 속에 드러난 그의 활약상을 유추해 볼 때 8세기 후엽에서 9세기 초를 전후하여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자랐고, 섬에서 꿈을 펼쳐나갔으며 섬에서 꿈을 이룬 진정한 섬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위대하였고, 그의 활동은 신라의 황금기를 주도 하였기에 우리는 그를 바다의 왕으로 부른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러했지만, 섬에서의 삶은 매우 고단하고 힘겨운 것이었다. 우선 충분한 농토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주로 어업에만 종사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다는 육지보다 몇배나 위험한 곳이었다. 언제 어디서 바람이 바뀔지 모르고 파도가 거세어질지 모르며, 어군이 바뀌어 질지 모른다. 따라서 바다의 일이란 노련한 뱃사람의 조언에 의존해야 되지만, 아무리 노련한 뱃사공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해적의 출몰이었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로 인해 이전보다 두배가 넘는 넓은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지만, 행정력은 그 모든 지역을 통제할만큼 강력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섬 지역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열악하였고, 해적이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여도 군대를 보내 백성들을 보호할 여력도 없었다.

더구나 완도는 수도 경주에서 매우 떨어져 있는 낙후 지역이었다. 아마 왠만한 관료나 귀족들은 그곳에 그런 섬이 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장보고는 그런 외롭고도 혹독한 장소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것이다.

장보고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에게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운 정연이란 고향후배가 있었다. 정연은 비록 장보고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무려 50리를 헤엄쳐 갈 만큼 뛰어난 수영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보면 숨조차 쉬지 않고 갔다고 하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육지에서의 용맹역시 장보고보다 앞서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장보고는 넓은 아량과 통솔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둘은 항상 실력을 겨루었지만 정연은 장보고를 '형'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무슨 이유로 당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우선 당시에는 신라와 당나라의 무역이 매우 활발하였는데, 무역선을 타고 당나라로 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장보고와 정연은 삼국사기등에도 언급되었지만 재능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이다. 그러나 완도라는 지역은 그들의 포부와 재능을 담기엔 너무나 작은 지역이었다. 또 옛 백제의 섬출신이라는 점등도 지역적인 차별을 받기 충분하였다. 당시 당나라는 그런 차별을 받고 있는 장보고와 정연에게 기회의 땅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약 장보고가 무역선을 타고 갔을 정도라면, 그는 적어도 그의 출신지에서는 어느정도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지역적 기반이 훗날 청해진 창설에 큰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과거 '해신'이란 드라마에서 나온 것 처럼 노예로 끌려 갔을 가능성이다.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노예무역근절을 들었듯이 당시 성행하였던 노예무역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보고 자신도 노예생활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이 처한 어렵고 힘겨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당나라로 갔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는 전문직 군관인 절도사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인재들을 필요한 실정이었다. 바로 위기가 곧 기회인 땅이었지만 위기를 극복해 내지 못하면 다가오는 것은 허무한 죽음뿐인 땅이었다.

장보고와 정연은 과연 스스로 길을 택하였는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당나라로 건너가게 되었는가? 개인적으로 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섬지역 출신이라는 열등의식과 신라인들의 의도적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로의 출항이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 일본인과 함께 느낀 해상왕 장보고의 힘!





해상왕 장보고 2 - 당제국 속의 신라인.

7세기 중엽 안녹산과 사사명으로 대표되는 절도사들이 중국대륙을 휩쓸었다. 절도사들이란 당나라의 군제인 부병제가 모병제로 바뀌면서, 이들을 통솔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인 전문직 군관이었다. 그런데 점차 중앙 권력이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지방 세력이 성장하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절도사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안녹산과 사사명은 755년부터 763년까지 낙양을 장악하고 국호를 대연이라 정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내부분열 끝에 관군에게 패배하여 763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장보고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졌던 사건이었지만, 장보고가 당나라로 건너가 활약을 하던 8세기 초엽까지 당나라는 여전히 내란과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의 직책에 있었는데, 비교적 낮은 직책이었지만 신라인으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산동반도 일대에는 신라인의 상업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던 장소이다. 따라서 비록 직책은 낮으나, 당나라의 관료였던 장보고를 중심으로 하여 신라인들이 결집하게 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직책이 너무 낮고 당제국에 귀속되어 있는 신분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제국과의 연고를 끊을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정확한 기록이 나와있지 않아 장보고가 당제국에서 벌였던 활약에 대해 추측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일본 승려 엔릴의 일기나 정연이 장보고가 귀국한 후에도 여전히 무령군 소장직에 있던 점을 고려 해 볼 때, 정연을 무령군 소장직에 있게 하여 당제국과의 연고를 유지하는 한편 자신은 상업활동에 전념하여 신라인들의 결집을 추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엔릴은 견당사로 당제국을 둘러보며 당시의 정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는데, 그의 기록을 살펴 보면 신라인들은 산동반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같은 신라인의 산동반도 장악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엔릴의 기록 중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법화원과 장보고의 긴밀한 관계이다. 

법화원은 서해가 바라보이는 산동반도 적산 언덕에 위치하면서, 신라인을 결집시키고 배들의 무사 항행을 기원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런데 장보고는 이 절에 매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를 기부하였다. 물론 이것은 장보고가 완도에 완전하게 터전을 잡은 다음의 일이긴 하지만, 이미 중국에 있을 때 부터 법화원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 당시에 종교의 힘은 매우 세속적인 것이어서, 종교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강력한 세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매우 힘들었다.

삼국사기 등에는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직을 수행하였던 기록만이 마치 당제국에서 활동했던 내용이 전부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김부식이 가진 막연한 모화사상과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당제국 체류시절 장보고의 활약상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법화원을 중심으로 신라인을 결집시키고 또 그곳에 신라방을 만들어 전진기지를 세우고, 무역기반을 견고하게 닦은 다음 신라로 귀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활약을 일본인 승려 엔릴의 일기를 통해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다.

삼국사기는 분명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가장 중요한 역사서중 한권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김부식의 편협한 시각과 뿌리깊은 모화사상은 장보고의 진면목을 가리기에 충분하였다.

장보고는 훌륭한 무장이기도 하였지만, 뛰어난 사업가였으며 무역상이었으며 개척가였다. 그리고 그러한 장보고의 귀환은 신라를 요동시켰으며, 신라의 역사를 바뀌게 하였다.






해상왕 장보고 3- 해상왕국을 건설하다.

서기 828년 흥덕왕(재위기간 826∼836) 3년, 왕은 한 장수에게 뜻밖의 재안을 받는다. 그것은 군사 1만명으로 淸海(청해)즉 완도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흥덕왕은 그가 누구인지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출생은 미천하였지만 당나라로 건너가 소장직을 맡았고, 또 산동방도 일대에 법화원과 신라방을 건설하여 무역기지를 건설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어릴적 이름은 궁파, 그러나 이제는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진 인물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보면 완도는 신라해로의 요지라고 표현할 만큼, 비록 작은 섬이었으나 전략적 가치가 높은 지역이었다. 신라본기에는 장보고가 1만명으로 완도를 지키겠다고 표현되었고, 열전에는 왕이 장보고에게 1만명을 내어 주었다고 되어있어 내용이 다소 상이하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볼 때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군사 1만명을 파병할만큼 신라조정은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장보고의 1만 군대는 사병집단일 가능성이 더 높고, 삼국사기의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흥덕왕의 재가를 받은것은, 군사양성과 보유를 합법적이고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대규모 군사를 양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산동반도 일대에서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역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막대한 재력을 축적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해적들의 도서지역 침략행위는 매우 심각한 실정이어서, 섬과 해안지역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함부로 뺴앗고 포로로 잡은 사람은 노예로 파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였다. 장보고역시 해적행위 근절과 백성의 보호를 대의명분으로 하여 군사력보유의 정당성을 얻었던 것이다.

이때 장보고에게 합류한 것이 바로 정연이다. 정연은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직을 그만 둔 후에도 한동안 소장직을 유지하다가, 신라인으로서 한계성을 느끼고 사퇴한 상태였다. 그때 풍원규라는 사람이 장보고에 귀의할 경우, 생명의 위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면 정연 역시 많은 신라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장보가 경쟁상대로 간주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보고는 이러한 우려를 모두 불식시키고, 정연을 예전에도 그랬듯이 친아우 이상으로 대해주었다.

그리고 장보고와 정연이 힘을 합치자, 한,중,일 삼국의 바다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가로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시 장보고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일본승려 엔닌이 쓴 일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있다.

그의 당나라 항행기록을 살펴보면, 안전한 해로를 확보하고 해적들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서는 장보고에게 의탁해야만 했다. 이때 엔닌과 함께 동승했던 신라 통역사 김정남이란 인물은, 중국내의 사정에 정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뛰어난 항해술과 선박의 보충및 수리 심지어는 우수한 신라선원의 탑승까지 주도하였다고 한다.

결국 일본의 공식적인 조공단의 당나라 항행조차 장보고의 영향력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심지어 엔닌은 장보고에게 대사라는 극존칭을 썼으며, 또 일본관리가 장보고에게 바치는 편지까지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에 도착해서도 장보고의 영향력은 오히려 더 절대적이다. 당시 산동반도 일대에는 신라인들이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신라방이라는 독특한 조계지를 형성하였는데, 이곳은 행정적으로 당나라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신라법과 행정이 적용되고 있었으며, 관리역시 신라총독이 관장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신라방의 모든 실질적인 경영과 무역일체는 장보고가 파견한 대리인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이처럼 장보고는 당시 신라, 왜국, 당나라의 삼국무역을 장악하였고, 그 엄청난 부는 신라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멀리 서역의 상인들과도 적극적인 교류를 벌여 바다의 실크로드를 열기도 하였다.

서기 828년 그해는 바로 장보고가 건설한 해상왕국이 열리는 해였다.








장보고와 정연의 군대는 해적들에 비해 수적으로도 압도하였을 뿐 아니라, 보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작전수행능력에서도 비교가 안되었다.

이후 장보고는 서남해안의 크고 작은 해적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한중일을 연결하는 삼각해상무역시대를 활짝 열었다.






해상왕 장보고 4- 바다에서 잠들다.

이후 장보고는 세력이 급성장하여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을 받고, 독자적 세력으로 해적을 완전 소탕하여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토대로 당나라·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해 나갔으며,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이렇게 대외무역활동에 주력하던 장보고는 김우징(金祐徵;신무왕)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신라는 서기 9세기 들어서면서 왕권이 매우 약화되었고, 왕위 계승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무력을 통한 왕권찬탈도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흥덕왕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당시 권력은 김우징세력과 김명세력으로 양분되면서 골육상쟁의 왕권다툼이 전개되었다.

당시 왕귀계승의 유력한 후보로는 김우징의 아버지인 김균정과 그와는 사촌지간인 김제륭이 있었다. 이에 김우징은 조카인 김양등과 세력을 규합하여 그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지만, 김제륭을 추대하려는 김명에게 패배하여 그의 아버지는 살해되고 김양은 화살에 맞는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왕위 계승 분쟁에서 승리를 거둔 김양은 서기 836년 김제륭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희강왕이다.

당시 장보고는 중앙에서의 왕위계승분쟁에 대해 대체적으로 관망세를 유지하며, 정치에 개입하기 보다는 청해진을 무역의 중심지로 만드는 사업에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 신라의 대외무역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김명과 한동안 대치상태에 있던 김우징은, 점점더 김명세력의 압박이 심해지자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장보고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보고는 관망적인 자세를 유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정치적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우징은 장보고에 의탁하고 있었지만, 반정을 일으킬만한 명분이 부족하였다. 왕위를 두고 골육상쟁을 벌인것은 김명과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고, 이런 이유로 김명세력을 압도할 수 있는 확실한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김명은 자신이 옹립한 희강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서기 838년 희강왕은 만 2년만에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명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민애왕이다. 장보고에 의탁해 있던 김우징은 드디어 왕을 시해한 자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얻었으며, 여기에 장보고도 뜻을 모아 정연과 함께 군사 5000명을 지원 하였다. 장보고의 군사는 수적으로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당시 유약해질 때로 유약해진 신라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훈련이 잘된 정예병이었다. 더구나 신라군은 대부분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 징집된 농민군이 주력이었다. 그리고 이 반정에서 염장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총대장은 김우징과 함께 김균정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한 김양이 맡았으며, 무주 철야현 전투와 달벌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구에 육박하게 되었다. 그러자 민애왕은 김흔을 대장군으로 삼아 대구벌에 10만대군을 집결시켰다. 그야말로 총 병력 1만에 불과한 장보고의 군대로서는 매우 불리한 전투였음이 분명하였다. 더구나 상대는 미리와 유리한 고지를 우선 점령한 후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유리하다고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장보고의 군대는 단 5천의 군사로 무주를 점령하였고 남원과 철야현 등지에서 연전연승을 하여 사기가 중천한 상태였다. 반면 신라의 군대는 민애왕은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만큼 충성심도 약하였고, 사기도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그리고 전투의 결과는 장보고 군대의 압승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신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10만의 대군으로도 장보고의 군대를 막을 수 없음을 알자, 민애왕의 지지세력은 순식간에 흩어졌으며, 결국 홀로 있던 민애왕은 난병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신무왕이었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하고 식읍 2000호를 내렸다. 신무왕이 죽은 뒤 문성왕에 의하여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었으니 이 때가 장보고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고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등 삼국 무역을 장악하고, 일설에는 동남아나 인도까지 직항로를 개설하였다는 주장이 있을 만큼 동방의 작은나라 신라를 세계적인 무역대국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는 인구 80만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장보고에게도 서서히 불운이 다가왔다. 문성왕은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각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장보고 딸과의 혼인을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이 논의는 845년 신라 조정 대신들의 집중적인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유는 장보고의 출생이 섬지역었다것과,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고리타분한 잘못된 후비간택은 국가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정도였다. 

이와 같은 논의는 그야말로 지역적 차별에 근거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과거 왕들이 가졌던 절대권력을 행사 할 수 없었고 결국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막상 반대를 하고보니 장보고의 행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반정당시 단 1만의 병력으로 신라 주력10만대군을 괴멸시킨 무적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병력을 이끌고 난신을 처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신라 금성을 향해 공격해 온다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여기에 삼국사기는 장보고가 반란을 꾀하였다고 되어있지만 열전에는 장보고를 재상으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것은 어찌보면 신라왕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를 다소 왜곡시켜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까지 들게 하는 대목이다.

아무튼 신라 대신들은 이제 어떻게 하면 장보고를 토벌할 수 있을까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때 다시 등장하는 인물이 염장이다. 염장은 반정에 참여하였을 정도로 무주에서는 꾀 이름있는 용장이었으며 나름대로 배포도 있었던 인물로 여겨진다. 또 그는 장보고가 우수한 인재에게는 어느 누구라도 우호적으로 맞이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염장은 이점을 노렸다. 그는 단신의 몸으로 장보고의 진영에 찾아갔고, 장보고가 술취한 틈을 타 장보고의 칼을 꺼내 살해하고 말았다.

이후 청해진은 5년정도 더 유지되었지만 정확히 누구에 의해서 주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장보고를 암살한 염장이라는 설도 있고 장보고와 동고동락한 정연이라는 설도 있긴 있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누구에 의해 운영되었던 장보고 시절 누렸던 영화를 두번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신라가 잃은 것은 장보고라는 영웅적인 인물 한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장보고로 대표되는 국제무역상에 있어서 신라의 대외신임도를 잃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대외신임도를 잃었을 때 어떠한 상황이 오리라는 것은 지난 IMF체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청해진은 점점더 쓸모없는 지역으로 변모하였으며, 중앙정부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지역세력의 반발을 근절하기 위하여 851년 청해진을 완전철폐하고 주민은 벽골군(碧骨郡;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그렇게 잠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이루어 나갔던 해상왕국의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바다길 뿐 아니라 땅의 길과 하늘길에서도 이루어 나갈 것이다. 모든길이 열리고 대륙과 해양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오면, 그가 그렸던 세상은 그제서야 활짝 열릴 것이다.







전라남도의 작은섬 완도출신인 장보고, 그의 출생이나 당나라로 건너가게 된 경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향후배인 정연과 함께 무령군 소장직에 올라 무공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장보고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산동반도 일대에 신라세력을 규합, 새로운 상인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또 무령군 소장직을 하며 절도사들의 군사양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게 된 그는 828년(흥덕왕 3년 신라로 귀국, 왕에게 남해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莞島)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 승인받아 1만명의 민군(民軍)을 조직하여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였다.





          장보고의 해상무역로와 신라인 집단주거지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도에 있는 청해진 유적지는 국가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완도 본섬 동쪽으로 장좌리 앞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넙적한 섬 장도(일명 장군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00m 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무장인 장보고 대사가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지이다.

장보고 대사는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의 해상권을 장악,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유적으로 장도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 유적발굴조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ㄷ"자형 석촉석렬, 우물, 토기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이 장도를 중심으로 완도의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물이 빠졌을 때는 장도 남쪽 갯벌에서,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 놓았던 것인 목책의 흔적이 드러난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 곳 장도와 주변 육지 일대 전체를 청해진 터로 보고, 장도는 청해진의 전진 기지와 초소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장도는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곳이라기보다 당시 번성했던 청해진과 번창했던 무역, 장보고의 활약 등을 생각하는 의미 있는 역사 유적지로 찾아가볼 만한 곳이다. 유적으로는 청해진성, 와당편 다수, 토기편, 사당, 법화사지터 등이있다. 주변에 신지도, 두륜산 도립공원, 충무공 유적지,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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