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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조선시대의 회화

신윤복의 풍속화


혜원(惠園) 신윤복(申潤福). 

조선 후기의 풍속(風俗)화가. (1758 ~ ?, 일명 申可權)
본관 고령.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신윤복은 조선 후기 화원화가로 1758년에 태어났다. 화원으로 오래 봉직한 신한평의 아들이다. 그에 관한 일대기는 거의 알려진게 없다. 여색을 밝히고 음란해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구전이 오경석 선생과 오세창 선생 이동주 선생을 통해서 들릴 뿐이다. 이는 비단 신윤복 뿐만 아니라 여느 화원화가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일대기에 대해서 알려진 화원은 거의 없다.

김홍도·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그는 풍속화뿐 아니라 남종화풍의 산수와 영모 등에도 뛰어났다. 
조선 후기는 회화사상 특기할 만한 새로운 경향, 즉 명·청시대의 미술을 소화하면서 뚜렷한 민족적인 자아의식을 지닌 가장 한국적인 화풍이 형성된 시기였으며 신윤복은 이러한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의 애환을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남녀의 에로틱한 장면, 곧 양반·한량의 외도에 가까운 풍류와 남녀간의 애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단원과 혜원의 그림을 보건데, 아무래도 정조 연간부터 신윤복이 죽기 전인 순조 초년까지는 상당히 조선은 풍족한 국가였고 그것을 이룩한데 대한 조선 백성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던 듯 하다. 신윤복의 기년작은 1813년을 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신윤복이 1813년 근처 어느 년엔가 졸한 듯 하다. 여색을 밝혀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풍문처럼 신윤복은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고 춤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상당히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던 듯 싶다. 그 시대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지만 지금 시대에는 사진한장 남아있지 않은 당시 시대를 보여주니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가. (學古山房)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부친 신한평과 조부는 화원이었으나 그가 화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전해진 작품에 남긴 간기(干紀)로 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처네를 쓴 여인》에 있는 1829년이 가장 하한인 바 대체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혜원(惠園) 신윤복에 관한 기록은 오세창(1864-1953)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나오는 다음의 짧막한 구절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신윤복, 자: 입부(笠父), 호: 혜원(惠園), 본관: 고령, 참사 신한평의 아들, 벼슬은 첨사, 풍속화에 능함"

화원이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해도 직업화가로, 당시 수요에 따른 많은 풍속화를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으로는 국보 제135호로 지정한 《혜원전신첩》이 전한다. 모두 30여 점으로 이루어진 이 화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를 통해 외국에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사회 각층을 망라한 김홍도의 풍속화와 달리 도회지의 한량과 기녀 등 남녀 사이의 은은한 정을 잘 나타낸 그림들로 동시대의 애정과 풍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탄금(彈琴)》 등 6점으로 된 화첩 또한 명품이다. 아울러 초상기법으로 그린 《미인도》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걸작으로 손꼽힌다.


신윤복은 조선후기 3대 풍속화가로 칭해질만큼 혜원전신첩을 비롯한 신윤복의 풍속화들은 상당히 유명하다. 하지만 신윤복은 풍속화 이외에도 다른 부분에서 역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이는 또다른 3대 풍속화가인 김홍도, 김득신과 마찬가지이다. 김홍도가 실제적으로는 영모, 산수, 인물, 화조 등 대부분의 화목에서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김득신 역시 묵죽, 산수, 인물 등에서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인다. 신윤복은 혜원전신첩을 포함하여 약 50여점의 작품이 전해지는 듯한데, 전해지는 작품으로만 보면, 산수와 초상화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신윤복의 회화를 간단하게 특징짓자면, 깔끔한 구도처리, 섬세하고 세련된 붓질, 그리고 때때로 보여지는 자유분방함이다. 이런 특징에서 나타나는 신윤복의 회화는 전반적으로 낭만적이다. 신윤복의 본명은 신가권으로 알려져있다.



신한평. 자모육아도. 지본담채, 31 x 23.5cm, 간송미술관 소장.

신한평은 신윤복의 아버지로 1726년에 태어나 매우 오랫동안 화원으로 봉직하였다. 어진까지 그렸고 벼슬은 종3품인 첨절제사까지 올랐다. 이름 높은 김홍도가 종6품인 연풍현감까지 올랐던 것에 대조적이다. 호는 일재이다. 이 그림은 신한평의 그림 자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실정에서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풍속화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신윤복의 풍속화가 난데없이 등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사대부였던, 윤두서와 조영석 등이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하고, 정조때에는 김홍도, 신한평, 김득신 등 대다수의 화원이 풍속화를 그렸다. 신한평은 신윤복을 비롯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이 그림에도 2남 1녀가 그려져 있기 때문에 신한평의 처자식을 그린게 아닌가 추정케 한다. 그렇다면 저기 서있는 아이는 신윤복이 된다.


풍속화를 읽어보자.





미인도(美人圖)
● 미인도(美人圖),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족자 비단에 채색, 114.2 x 45.7cm, 간송미술관 소장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했을 것 같은 <미인도>는 신윤복의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풍속화와 함께 신윤복의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 신윤복의 작품 가운데 대작이기도 하려니와 비단 바탕에 고운 필치로 인물화 실력을 한껏 뽐낸 작품이다. 

배추잎처럼 부푼 담청 치마, 단이짧은 저고리, 고개를 숙인 앳된 얼굴, 가느다란 실 눈썹의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 좁은 입 등 조선후기 미인의 조건을 여실히 보여준다. 치마 아래로 한쪽만이 살포시 드러나는 외씨 버선은 절묘한 느낌을 준다. 얼굴의 표정은 마음까지 드러내 보여 주어 초상화를 방불케 한다. 쪽물을 들인 회청색 치마에 받쳐 입은 삼회장 저고리, 그에 조화된 자주색 댕기와 옆구리의 붉은 띠치장은 그 미모를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옷맵시의 아름다움이 한껏 배어 나온다. 여인의 복장과 더불어서 붉은 삼작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자연스러운 자태는 풍속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면서도 기존 왕공 사대부의 권위적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화로서의 예술성이 충만하다.

머리는 트레머리라고 하는 가발을 얹어 장식하고 저고리 춤이 짧고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젊고 어여쁜 여인을 묘사하였다. 요즈음 미인의 척도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볼수록 아름답다. 단아한 이마, 맑고 고운 눈, 작고 매혹적인 입술에 좁은 어깨 등 당시 미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고운 여인을 신윤복은 특유의 섬세하고 깔끔한 선으로 그려내고, 거기에 엷은 채색을 가미하여 더욱 단아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었다. "책상다리 한 여인의 가슴 속에 감추어진 춘의(春意)를 능숙한 붓끝으로 전신하였다"고 쓴 자신의 칠언시(七言詩)의 내용대로, 말려 올라간 치마 끝으로 버선발이 나와 있고, 고개 숙여 응시하는 표정에서는 여인의 연정이 물씬 풍겨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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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문화가 난숙기에 접어들면서 왕도귀족들이 향락적인 생활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그는 세습화원가문 출신으로 궁정귀족들과 연계된 생활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을 터이므로 그들의 취향과 속내를 속속들이 잘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언저리에 놀면서 여체미(女體美)에도 일가를 이룰 만큼 통달해 있었기에. 귀족들의 향락적인 감상안을 충족시킬 수 있는 농도 짙은 여속도(女俗圖)를 타고난 예리한 솜씨를 발휘하여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여속도 중에서 이렇듯 한 인물을 대상으로 그려낸 것은 유일한 것이어서. 쥐면 부서질 듯한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마도 혜원의 사람이었던 듯하다. 깃과 고름. 곁바대는 자주빛으로 하고. 끝동만은 옥색 천을 대어 멋을 부린 회장저고리는. 당시 유행의 첨단이었을 것이고. 윗단을 잣주름으로 촘촘히 주름잡고 허리밑을 불룩 키워서 숨막힐 듯 잘록한 세요(細腰)와, 탐스러운 둔부를 강조한 스란치마와. 곁바대 밑으로 살짝흘린 연지빛 속고름도 일류 멋장이가 아니면 부릴수 없는 색태(色態)였을 것이다.

삼단같이 윤기있는 커다란 트레머리를 귀밑머리 하늘거리는 갸날픈 목으로 다소곳이 받쳐이고, 옥색 끝동 밖으로 내민 상아빛 손으로는, 연자주빛 수마노 노리개와 진자주빛 고름을 수줍은듯 매만지며.옥색 스란치마 밖으로 외씨 같은 버선발을 상큼하니 내민 모습은, 장안 한량들의 애간장을 남김없이 녹여 내었을 것이다. 갸날픈 이목구비에서는 야산에 홀로 핀 제비꽃처럼 청초한 맛이 있는가 하면. 겨드랑이 밑으로 흘린 속고름과 치마 밖으로 살그머니 내어민 외씨버선은. 선정적인 요염미를 물씬 풍기고 있어. 관연 어째서 수많은 장안 여인중 유독 이 이인을 화폭에 남겨 놓았는지 수긍이 갈 만하다. [혜원 신윤복] 풍속화 - 허접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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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대표작으로, 조선시대에 보통 임금과, 높은 대신을 그리던 전신초상화 기법으로 일개 어린 기생을 담고 있어 그 소재면에서 매우 파격적이라 할 것이다. 이 그림에 관해서는 오주석 선생이 명문을 남기고 있으므로 발췌하는 것이 좋겠다.

"이것은 혜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입니다. 여성을 그리지 않았던 내외하는 세상, 조선시대의 여자 그림이니 보나마나 기생이겠죠? 기생이지만 저 얼굴 좀 보십시오. 아주 조촐하고 해맑은 인상이죠? 이 치마 아래에는 오색 또는 일곱 가지 색의 무지기라는 속옷을 입습니다. 층층이 색이 다른 속옷이 옅은 옥색치마 아래로 은은하게 비쳐 보였겠지요. 이런 것이 조선식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통치마가 푸하게 부풀었기 때문에 옛날 분들은 머리에도 큰 다래머리를 얹었습니다. 자연 위아래 균형이 잘 맞았는데, 시중의 그림 책 같은 데서 이 그림 설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에로틱한 그림이라고 해석한 것이 많습니다. 하긴 주인공이 옷고름을 풀고 있으니까요. 옷을 벗고 있습니다! 오른편에 드리운 것은 속옷 고름이죠. 연지빛으로 도드라지게 칠햇습니다. 요즘은 하도 이상한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는 세상이라서 어떨는지 모르지만, 예전 남정네들은 이런 기생의 연지빛 속고름이 드리워진 그림만 보아도 아마 가슴이 막 쿵쾅쿵쾅 했을거예요.

그런데 혜원이 여기다 뭐라고 써 놓았느냐 하면, '(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興物傳神)'이라 즉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까지 고스란히 옮겨놓았느뇨? 하였습니다. 자기가 그린 그림에 자기가 엄청 칭찬을 해 놓았죠? 그야말로 자화자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기에 연유가 있다고 봅니다. 이 여인의 눈빛을 자세히 뜯어보십시오. 이 앞에 누군가 남정네가 앉아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분명 여인이 옷을 벗기는 벗는 모습이지요. 옷을 입는 모양일 수도 있다고요? 하지만 아래 치마끈 매듭이 풀려 느슨해진 것을 보십시오. 하루 일이 끝난 고단한 몸을 우선 치마끈 매듭부터 풀러 숨쉬게 해놓고 이제 막 저고리도 마저 벗으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옷고름을 풀때는 이렇게 한 손으로 노리개를 꼭 붙들고 끈을 끌러야 아래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남자가 없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남자는커녕 아무도 없는 게 분명합니다. 이 꿈꾸는 듯한 눈매를 보세요! 이 맑은 표정이 남 앞에서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신윤복이 저 홀로 지극히 사모했던 기생을 그린 것 같습니다. 그것도 대단히 일류 기생을 말입니다. 아득하니 저 멀리 높이 있어서 도저히 제 품에 넣을 재간은 없고, 그렇다고 연정을 사그라뜨릴 수도 없으니까 이렇게 그림으로라도 옮겨 놓은 것 같아요." (學古山房)


신윤복이 그린 또다른 미인도들



-. '미인도'의 옷고름





기다림

조용한 대가의 뒷뜰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의 초조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여인이 들고있는것은 승려들이 쓰는 송낙이라는 모자다.

몰골법으로 그려진 발묵의 능숙한 처리로  나무에서는 혜원 그림답지 않은 문기(文氣)마저 느끼게 된다. 일반적인 평을 옮기자면 비스듬하게 처리된 담장과 나무 사이에 여인이 포치 되어 있어 여인으로 시각이 집중 되는 빼어난 구도 감각이 돋보이며 여인의 기다림이 감성적으로 잘 표현된 아름다운 그림이라는게 보통의 평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허나 그것으로 이 그림을 다 보았다고 한다면 왜곡된 감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란 제목을 누가 붙인건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그럴듯한 제목이다. 그런데 과연 그 기다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림을 읽는 의미가 달라진다.

그림의 주제는 당연히 여인이다. 축 늘어진 능수버들은 시간이 멈춘듯한 지루한 여인의 기다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인데 양손은 뒤로 제껴 기다림이 오래 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님이 올 것 같은 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여인의 얼굴중 일부만을 갸름하게 그려 더욱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왼쪽발을 살포시, 그러나 매우 긴장 되게 들어 올린 모이 여인이 초조해 하고 있음을 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야말로 애인을 기다리는 가슴 설래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수 있는 매우 아름다운 그림이다. [출처] [혜원 신윤복] 풍속화 - 허접거사




바람의 화원


김홍도가 묻는다.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 질문에 신윤복이 대답한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요? 그림이 그리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리움이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얼굴 그림이 되고, 그리운 산이 있으면 산 그림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신윤복에 관한 내용은 전해져 내려온 구전으로 이어진 가설적 사실이다. 여인의 아름다움이나 애정에 있어서 사실적인 그림을 그린것으로 유명한 신윤복이 그 이유때문에 그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로 스토리가 만들어진것이 <바람의 화원>이다. 




풍속화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혹은 혜원풍속도첩(蕙園風俗圖帖) 

1805, 종이에담채.
28.2*35.3cm.
간송미술관(성북구)
국보 제 135호

이 화첩에는 모두 30폭의 풍속화가 들어 있다. 이 화첩에는 오세창의 표제와 발문이 첨가되어 있다. 28.2 * 35.3cm 크기의 종이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30점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연당야유(蓮塘野遊[聽琴賞蓮])
기방무사(妓房無事)
청루소일(靑樓消日)
월하정인(月下情人)
월야밀회(月夜密會)
춘색만원(春色滿園)
소년전홍(少年剪紅)
주유청강(舟遊淸江)
연소답청(年少踏靑)
상춘야흥(賞春野興)
노상탁발(路上托鉢)
납량만흥(納凉漫興)
수하투호(樹下投壺)
무녀신무(巫女神舞)
주막거배(酒幕擧盃)
쌍검대무(雙劍對舞)
휴기답풍(携妓踏楓)
쌍륙삼매(雙六三昧)
문종심사(聞鐘尋寺)
노중상봉(路中相逢)
계변가화(溪邊佳話)
정변야화(井邊夜話)
삼추가연(三秋佳緣)
표모봉심(漂母逢尋)
야금모행(夜禁冒行)
유곽쟁웅(遊廓爭雄)
이승영기(尼僧迎妓)
단오풍정(端午風情)
홍루대주(紅樓待酒)
이부탐춘(嫠婦耽春)


조선시대 후기인 18세기 말에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를 엮은 연작 화첩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첩으로 여겨진다. 이들의 주제는 기방풍속에 두세 쌍의 행락과 남녀의 밀회가 중심이며 승려가 끼거나 색정을 돋우는 여속(女俗)장면 무속 주막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계절로 봄과 가을이 많고 야밤풍경이 많은 점은 유흥과 남녀의 정념을 태우기 좋은 때를 선택한 것이다.(소암 조홍근의 혜원풍속도첩 이야기)

이 화첩은 당시 일본인 거상 토미타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는 화첩의 그림들을 사진으로 찍어 담뱃값 포장지로 이용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이 화첩을 찾아오기 위해 몇 년 동안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결국 1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거금을 들여 이 화첩을 되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곱게 새로 표구도 했습니다. 이 화첩을 가지고 귀국했을 때 간송 전형필의 스승이자 감식안이었던 위창 선생님은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蕙園傳神帖]이란 유려한 행서로 제첨(題簽)과 발문(跋文)을 적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화첩의 이름, 즉 제첨이 [혜원전신첩]인데 문화재청 공식 이름은 [혜원풍속도]라고 되어 있어 약간의 혼선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국보 지정 당시 왜 원래 화첩의 이름인 [혜원전신첩]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전신첩(傳神帖)이란 말에서 풍기는 인물화첩이란 느낌이 전체 화첩의 성격을 축소시킬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혼자 유추해 보지만 그래도 엄연히 화첩의 이름이 있고 또 그 이름을 적은 분이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학계의 종장이자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었던 위창 오세창 선생님인데 이렇게 후대에 명칭을 바꾸는 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암조홍근)


이 작품은 각기 가로 28㎝ 세로 35㎝, 한지에 그려져있고 <연당야유(蓮塘野遊)>, <단오풍정(端午風情)>, <월하정인(月下情人)>, <기방무사(妓房無事)>, <청루소일(靑樓消日)> 등 주로 한량과 기생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냈으며, 18세기 말의 풍속과 복식을 엿볼 수 있다. 모두 30점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폭마다 제시(題詩)와 낙관이 있다. 구도는 동양화에서 중히 여기는 여백을 살리기보다는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대개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는데 유연하고 간결한 세필(細筆)로 특히 여체(女體)가 정확히 묘사되었다. 색정적인 표현이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지저분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신윤복의 작품은 현존 숫자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나마 국보 135호로 지정된 혜원풍속도첩의 그림이 있어 그나마 그의 그림 수준을 알 수 있다. 이 혜원풍속도첩의 그림은 특이하게도 도회지 기방의 풍속을 담았다. 과거 윤두서, 조영석의 풍속화가 주로 농가를 주제로 삼았고 단원은 서민과, 고고한 양반을 주제로 삼은 반면에 신윤복이 선택한 소재는 상당히 특이하달까,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요염한 기생이 등장하고 멋드러진 양반내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멋드러진 한량도 있고 집안의 노비를 탐하는 50대의 채신머리 없는 양반도 있다. 기생들이 웃옷을 벗고 멲감는 모습을 훔쳐보는 10대 후반쯤의 스님도 있고 훔쳐보다가 걸려서 끌려나온 스님도 있다. 이러한 풍속화들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양반이나 승속에 대한 비판보다도 당시 풍속의 풍성함, 혹은 에로틱함에 대한 찬양같다는 느낌이 더 든다. 즉 시대가 그만큼 화평하고, 음양 조화가 잘 이루어져 웃지 못할, 하지만 건강한 풍속을 이뤘다는 정조 대의 자부심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學古山房)


혜원이 활동했던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반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는 전통적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경제력이 사회적 행세의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 시기였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이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은 양반의 위세보다는 중인의 돈이 더 큰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도시 뒷골목의 분위기를 30점의 풍속화로 포착하고 있다. 조선 후기 성문화의 개방추세는 풍속화 뿐 아니라 각종 문학작품에도 다투어 등장한다. 특히 1809년(순조 9년) 씌어진 애정소설 ‘절화기담(折花奇談)’은 혜원의 풍속화와 꼭 닮은 사회상을 그려내고있다. ‘절화기담’은 이생이라는 선비가 우물가에서 순매라는 이웃집 여종에게 반해 요즘말로 ‘작업’을 하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출처: 조금씩)


혜원전신첩이라는 이름의 화첩,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있고 1970년 국보로 지정되어 국보 135호인 30점의 작품, 이 화첩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혜원 신윤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 화첩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것은 말로하기 힘든 것이다. 이 화첩에 속한 녹록치 않은 솜씨의 그림들은 신윤복을 평가하는데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할 뿐더러, 조선후기 풍속화의 발달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그 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화첩의 그림들은 아주 잘 어울어져있다. 무엇이 잘 어울어져있냐면, 낭만적이고 세련된 산수풍경과 멋드러진 인물들이 잘 어우러져있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들에 산수배경들은 단순할지라도 그림의 격조를 높이는 상당히 수준높고 세련미 있는 것들이다. 

<여흥>





● 쌍검대무(雙劍對舞), 검무도(劍舞圖) - 양손에 칼을 들고 대작하여 춤을 추다 

이 그림은 세력있는 귀족이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들과 가무(歌舞)에 능한 기생을 불러다가 즐기는 장면이다. 악공과 기생의 수로 보아 이 놀이가 보통 규모는 아닌데. 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직 주인대감과 그의 자제낭관(子弟廊官)인 듯하니, 일가의 세도가 어지간한 모양이다. 혹시 혜원 신윤복을 키워준 어느 풍류 재상집에서의 한때인지도 모르겠다.

화면구성에 있어서 일체의 배경을 무시하고 검무하는 장면만 가득채운 대담성을 보였으나. 주제표현에 조금도 군색함이 나타나지 않으나. 이는 인물의 포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시각의 초점이 되는 검무기생들은. 의상에서 청홍의 강렬한 대조를 보이면서 화면을 압도하는데. 주인을 비롯한 관객들과 악공들이 이를 중심으로 포열(布列)함으로서 화면의 비중은 평형을 이룬다.

그런데 검무기생의 날렵한 동작에서 오는 율동감은, 관객들의 도취된 몸짓과 악공들의 신바람나는 연주에 혼연일치를 보여 아연 활기를 띤다. 이렇게 놀이에 참석한 인물들의 심리를 꿰뚫어 순간적인 동작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을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화가의 예리한 안목이라 하더라도 그리 쉽지않을 일이다. 따라서 작가 신윤복이 이런 세계에 얼마나 익숙하였던가를 짐작할수 있는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극도로 세련된 차림을 보이는 것도 그의 주변을 보는듯 흥미롭다. (찬솔갤러리)






● 상춘야흥 (賞春野興) 무르익은 봄날의 들판에서 여흥을 즐기다.

화가는 진달래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어느 봄날, 뉘 댁 후원에서 벌어진 조촐한 음악회 장면을 그렸다. 차비를 갖춰 산으로 놀이를 나서는 대신 후원 뜰에 자리를 마련해 피리와 장구를 곁들인 호사스러운 삼현육각 대신 거문고와 대금, 해금연주자만 초청해 ‘넘치는 유흥’이 아닌 조촐한 풍류의 한 순간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 음악회의 무대가 뉘 댁 후원이라고?’ 물론 뒤쪽으로 보이는 암벽과 산기슭을 보면 어느 집 후원이라는게 좀 뜻밖이지만, 그림 아래쪽에 좋은 돌로 잘 쌓은 축대는 이곳이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야산이 아니라 어느 양반 집의 후원임을 말해준다.

아마도 이 댁 주인은 평소 잘 보이고 싶은 어떤 분에게 ‘날도 따뜻하게 풀렸고, 꽃도 피었으니 우리 집에 오셔서 조촐하게 한 나절 보내시죠’라는 전갈을 보냈을 것이다. 그 분의 평소 취향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집 주인은 장안의 명인(名人)을 초청하고, 그 장소를 사랑방 대신 야취(野趣) 넘치는 후원으로 정했는데 이 그림의 분위기로 보면 이날 손님 초대와 음악회는 아주 성공적이었음에 틀림없다. 음악에 흠뻑 취한 주빈의 표정이 그 성공을 말해 준다.

집 주인은 손님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왼편에 물러앉은 이로 보이고, 이 양반이 초대한 주빈은 자태 곱고 반듯한 여기(女妓)와 함께 음악가들을 마주보고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림 속의 정경은 대금과 해금, 거문고 주자세 사람의 연주를 시작한지 시간이 꽤 흐른 듯하다. 가운데 앉은 주빈은 옷소매가 살짝 들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몸을 기울여 음악에 열중해 있다. 그의 굳게 다문 입 꼬리는 기분 좋게 올라가 있고, 눈빛은 온화하며 얼굴에는 화기(和氣)가 가득하다.

특히 거문고 명인의 연주에 심취한 듯 그의 눈길은 온통 거문고에 쏠려 있는데. 그 표정이 얼마나 진지하고 즐거워 보이는지 그림을 바라다보는 우리들에게 “이 거문고 소리 좀 들어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고 권하는 것 같다. 그런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한참 더 그림을 들여다보면 손길을 잠시 멈추고 거문고 주자를 향한 해금 주자의 표정,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반듯하게 앉은 주빈 옆의 기생이 온 몸으로 음악을 감상하는듯 조용히 눈을 감고 앉은 모습, 조금 멀찍이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집 주인의 표정이 보이고, 어느새 그들과 함께 우렁우렁 울리는 거문고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봄기운을 즐기며 정원에서 듣는 거문고 소리, 거문고와 어울린 대금과 해금의 음악은 정말 특별한 감흥을 준다. (찬솔갤러리)





● 청금상련(廳琴賞蓮), 연당야유(蓮塘野遊) - 관청에는 거문고 소리가 울리고, 연꽃은 칭찬할 만하다. 

1) 연못가에서 세 남자가 기생을 데리고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옛 선비들은 기생들과 즐기는 놀이도 양반들이 지녀야 할 풍류로 생각하였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들이 보인다. 기녀들의 옷맵시나 선비들의 옷매무새, 가야금,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잘 알게 해 준다.

2) 후원에 연당(蓮塘)이 있고, 고목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잔디가 가득 깔린 크나큰 저택을 가진 주인이, 연꽃이 필무렵에 맘에 맞는 친구들을 청하여, 연꽃감상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모양이다. 연당을 거치는 선들바람이 청향(淸香)을 실어오고. 가야금의 청아한 선율이 이 위에 어리는데. 의관을 파탈할 정도로 자유롭게 연꽃과 여인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격의없이 놀 수 있는 사이라면 어지간히 무던한 사이일 것이고. 의복 차림으로 보면 벌써 당상(堂上)의 품계를 넘어 있어서. 나이도 그리 젊지는 않을 듯 하니 정말 허물없는 오랜친구들인 모양이다. 모두들 준수하게 빼어났지만 차림새가 빈틈없이 세련되어 귀족의 몸에 밴 기품을 대하는 듯하다.

이는 화원이었던 혜원 신윤복이, 궁정 주변에서 이들 귀족생활을 남김없이 눈에 익히고 살아온 때문에. 그 진면목을 이와 같이 실감나게 표현할수 있었을 것이다. 가리마를 쓴 기생의 모습에서나 갓끈을 귀밑에 잡아 맨 귀인의 冠차림에서 당시의 남녀冠飾을 알수 있으며. 운치있게 둘러진 석축과 고목의 표현에서는 왕조시대의 격조높은 造園환경을 실감 할수 있다. (찬솔갤러리)

3) 잔디밭 광경을, 담너머 훔쳐보듯 운치있게 굽은 소나무. 조선 후기 사대부 가문이 높은 담장을 선호한 이유를 알듯. 당시 정원이 어떤 용도로도 쓰였는지 알 것 같다. 소나무 아래 긴 담뱃대를 문 여인은 의녀. 세도 권신 가문 연회에 파견된 궁중 의녀인듯. 지체 높은 신분의 여인들 진료를 맡았던 궁중 의녀, 조선시대 후기에는 권신들의 연회에도 파견되었다. 당초 의녀 제도 설립 목적과는 변질되어 운용된 듯. 사대부의 고루한 유교관과 달리 실추된 성 윤리를 보여준다. 






● 주유청강(舟遊淸江), 선유도(船遊圖) - 맑은 강 위에서 뱃놀이를 하다. 

1) 뱃놀이를 하고 있는 곳은 망망한 강 한복판이 아니라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암벽 아래로 설정함으로써 그림의 주제에 맞는 아늑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화면 절반 정도의 위치에서 위아래로 이분되어 위쪽은 어두운색의 거대한 암벽이 넓은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아래쪽은 밝은 빛깔의 인물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어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면의 상단부에 암벽으로 가득 차게 그려놓고 암벽을 배경으로 하여 유람선을 가까이에 그려놓았다. 시원하고 대담하게 그린 암벽의 형상에서 신윤복 산수화의 뛰어난 기량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암벽의 배치는 그림 주제의 풍치를 돋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자세와 배치에서 조형적 변화의 미를 신중하게 고려하여 그린 것으로, 뱃머리 쪽에 앉아 생황[笙篁]을 불고 있는 여인을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하여 독립적으로 배치한 점. 담뱃대를 잡고 있는 남녀2인과 대금을 부는 젊은 총각과 뱃전에 앉아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긴 선비 바로 옆에 흐르는 물 속에 두 손을 담는 여인, 그리고 뒷전에 먼 곳을 바라보는 남자, 삿대를 쥔 사공 등을 배치 방법과 각 인물들의 다양한 자세에서 변화의 미를 볼 수 있다. 고운 자태의 기생들과 뱃놀이를 하며 자연의 풍취에 취해 있는 한량들의 모습을 분위기 있게 형상화한 그림이다.

화면 위쪽에 "一笛晩風聽不得 白驅飛下浪花前"라고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다."


2) 이 주유청강은 아마도 이 화첩의 대표작으로 꼽을만한 그림일텐데, 역시 간략화된듯 하면서도 상당히 세련된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소 단원의 영향이 느껴지는 수지법의 수목도 상당히 조형미를 갖추어 그림의 분위기를 배가시키고 있다. 그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배를 띄우고 물놀이를 하고 있다. 물결은 잔잔하다. 가채머리를 크게 하던 세명의 기생과 큰 갓을 쓴 사대부 인사 세명 그리고 노젓는 이와 퉁소를 부는 아이, 이렇게 구성되어있다. 진한 쪽빛 치마를 입은 여인은 물을 뜨고 있고, 젊은 사내는 그 여인을 감상하고 있다. 또 옅은 쪽빛을 입은 기생에게 젊은 사내는 담뱃대를 물려주며 뒤에서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을 풍류있게 하고 있는건, 배에 좌측으로 치우쳐 서있으면서 뒷짐을 지고서 생황부는 기생을 바라보는 사내이다. 나이가 중년쯤 되보이는 이 사내는 지금 상중이다. 그럼에도 선유놀이를 한다는 것은, 당시의 풍속이 주자말씀대로만은 돌아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풍채가 고고한 중년의 양반내는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선유놀이를 즐기는데, 그 시선이 참 아름답다. 멀찌감치 서서, 생황소리에 감싸이는 뱃머리에 앉은 여인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3) 왕도(王都)의 화려한 문물은 여유있는 귀족생활의 격조 놓은 운치에서 찾아볼수 있다. 녹음이 우거지고 강심에 훈풍이 일어나자, 몇몇 자제들이 한강에 놀이배를 띄우고 여가를 즐기는 것 같다. 외형적인 호사를 금기로 여기던 조선시대 귀족들이니, 호화선을 꾸밀 리 없고 다만 일엽편주에 차일을 드리우고, 풍류를 아는 기생들과 젓대잡이 총각 하나를 태웠을 뿐이다.

신록이 그늘진 절벽 밑을 감돌아 나가는 뱃전에서는, 유량한 생황소리와 동랑(洞朗)한 젓대소리가 섞바뀌어 일어나서 강심에 메아리 지고, 일렁이는 잔물결은 뱃전을 두드리니. 여기에 詩情이 흐르는 사랑이 무르익는다. 뱃전에 엎디어 스치는 물살에 손을 담가 보는 여인이나, 이를 정겹게 턱을 고이고 지켜보는 선비의 모습에서도 그렇거니와. 어깨를 감싸고 담뱃대를 물려주는 한쌍의 남녀에게서는, 시샘이 날 만큼 농밀한 사랑이 엿보인다. 이런 중에서도 남의 일에는 아랑곳없이 망연히 뒤짐지고, 시상에 잠기는 여유를 보이는 것은 역시 왕조귀족의 몸에 밴 교양이라 할수 있겠는데, 삿대질에 열심인 뱃사공도 자기일에 충실하고 있어서. 음악을 연두주하는 두사람의 모습과 함께 질서있는 조화를 이룬다. (찬솔갤러리)






● 납량만흥(納凉漫興) - 피서지에서 흥이 무르익다.

그림의 윗부분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고,아래쪽 넓은 공간에 춤을 추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림 오른쪽에 네 명의 악공이 있는데, 장구를 치는 사람이 하나,피리를 부는 사람이 둘, 해금을 켜는 사람이 하나다. 춤을 추는 여성은 아마도 이 악공과 한 팀을 이루고 있는 기생일 것이다.조선 후기에는 악공과 기생이 한 팀을 이루어 민간의 초청에 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이 악공과 기생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터인데, 당연히 지금 춤을 추고 있는 양반과 그 왼쪽의 두 사내다. 짙은 나무 잎사귀로 보아,계절은 여름이 틀림없다. 어느 여름날 시원한 산그늘을 찾아가 풍악을 잡히고 기생과 춤을 추면서 보내는 한때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그림 왼쪽에 있는 두 사내의 포즈가 가관이다. 한 사내는 갓끈을 풀고 갓을 젖혀 쓰고 있고, 아래쪽 사내는 비스듬히 누워 있다.둘 다 검은 갓끈을 하고 있고, 또 아주 젊은 얼굴로 보아 벼슬하지 않은 젊은이다. 근엄한 양반들이 어찌 갓끈을 풀고 갓을 젖혀 쓰고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남녀 한 쌍의 춤을 감상하고 또 직접 춤을 출 수 있다는 말인가.

조선시대 양반에 대해 지금 사람들은 오해가 많다. 즉 양반이면 모두가 예를 지키고 법도를 따라 근엄한 표정으로 행동을 삼가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옛날 양반이 지금 사람들보다는 유가가 요구하는 윤리와 도덕,그리고 예를 더 지킨 것은 사실이겠지만,그것이 모든 양반들에게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도 일관되게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마도 조광조나 율곡이나 퇴계,남명 선생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이고, 이 그림에서처럼 더우면 갓끈을 풀고 비스듬히 기대기도 하고 기생과 어울려 춤도 추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찬솔갤러리)






● 쌍육삼매(雙六三昧) - 쌍육놀이에 푹 빠지다.

1) 서양 장기처럼 생겼는데 쌍륙이라고 하는 놀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 삼국 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와 조선 시대까지 크게 유행한 놀이였다. 이 놀이의 준비물은 말판과 말 그리고 주사위. 주사위 두 개를 던져서 나온 숫자만큼 말을 움직여 상대편 말을 잡아 먹는다. 보통 둘이서 하거나 여럿이 편을 짜서 하기도 했다는데, 이 그림에서는 선비와 아리따운 여인네가 맞붙었다.

여인의 표정은 어딘가 여유만만해 보이지만 선비는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망건까지 벗어 던진 것으로 보아 꽤나 속이 타나 보다. 선비는 언제나 의복과 모자를 중요하게 여겨 웬만하면 맨상투를 드러내지 않는 법이거늘. 가운데 여인네는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서 이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다.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폼이 두 사람의 겨루는 모양이 꽤나 재미있어 보인다. 언제나 선수가 있으면 구경꾼이 있어서, 겨루는 두 사람의 초조한 심정과는 아랑곳없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게 재미있다.

2) 쌍륙은 서양장기같이 말을 옮겨 상대방의 궁에 먼저 들어가는 쪽이 이기는 놀이이다. 말은 보통 검은말 16개, 흰말 16개인데 나무로 만들거나 뼈로 만들어 썼다고 한다. 주사위 두개를 굴려서 나온 숫자대로 옮기는데, 말을 어떻게 잘 옮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단다. 이것은 서아시아 쪽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고 하며, 주로 부녀자들이 즐겼다고 한다.

왼쪽 남자는 갓 아래 검은 복건(검은 헝겊으로 위는 둥글고 뾰족하고 뒤는 넓고 긴 자락을 늘어뜨렸으며, 양 옆에 끈이 있어 잡아매었다. 요즈음 갓난아이들 돌 때 쓰는 형태로 보면 된다.)을 쓰고 있어 벼슬하지 않은 유생임을 말해준다. 오른쪽 남자는 탕건(평상시 집안에서 맨 상투머리로 손님을 맞기 민망하여 쓴 것으로 앞이 낮고 뒤가 높게 턱이 진 모양이다)을 벗어 왼편에 놓아두고 배자(소매 없는 덧저고리)만을 입은 것을 보니 놀이에 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푸른색과 붉은 색의 말로 편을 갈랐다. 기생(야외에서 양반집 부녀자들이 거리낌없이 남자들과 마주앉아 놀이를 할 수 있었을까?) 쪽에만 푸른 말 두개가 나와 있는데, 판 위의 말은 모두 각 14개씩이다. 아마 붉은 색 말 두개는 남자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나 보다. 내려온 말이 두 개씩 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니 놀이는 이제 막 시작되었나보다. 그래도 초반의 기세가 어느 순간 승패를 가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지  “기러기 비켜나는 울음소리 역력한데, 인적은 고요하고 물시계 소리만 아득하다.” 고 온 정신을 놀이에 쏟고 있는 모습을 오른쪽에 시로 써 놓았다. (찬솔갤러리)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1) 투호와 쌍륙 - 서울신문







● 임하투호(林下投壺) - 수풀 아래서 투호놀이를 하다.

남자 넷과 여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남자는 차림새로 보아, 점잖은 양반이다.

여자가 홀로 따라온 것이 이상하다. 이 여자는 일가친척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때는 18세기. 가부장제가 가장 완벽하게 작동하던 시기다. 양반가의 젊은 여성은 집안에 유폐되어 있어야만 하였다. 남자들을 따라 야외로 나가서 투호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여성은 아마도 기생일 것이다. 남자들이 야외에서 투호를 할 때 가까이 지내던 기생을 불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방>





● 기방무사(妓房無事) - 기방 안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 방안에는 탕건을 쓰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오입쟁이가 있고, 기생의 몸종인 듯한 노랑저고리의 여자가 오입쟁이 앞쪽으로 엎드려 있다. 이제 막 집안으로 들어선 여인은 전모 아래 가리마를 쓴 걸로 보아 두말할 나위 없이 기생임이 분명하다. 기생은 외출했다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고, 그 사이 오입쟁이와 몸종이 방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묘한 것은 왼쪽의 나무들이다. 위쪽에 잎이 큰 활엽수가 있고, 아래에도 역시 녹음이 무성한 나무가 있다. 그 위쪽으로 발이 쳐 있으니, 계절은 한여름이다. 날이 더우니 기생이 전모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한여름에 왜 사내의 몸 위에 이불이 덮혀 있는가? 한여름에 누비이불을 덮고 있는 것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방안의 두 남녀는 이상한 짓을 하다가 갑자기 주인 기생이 찾아오자 누비이불을 덮은 것으로 여겨진다.

2) 현대적인 구도감각과 독특한 상황설정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수직선과 수평선 및 사건의 기하학적 구조에 의한 질서잡힌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정적인 구도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에 대하여 고요함과 기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하학적 짜임새를 지닌 건물의 기둥이나 벽이나 문짝 등은 모두 엷은 먹선이나 희미한 담묵으로 칠해져 있는 데 비해, 등장 인물들은 모두 강렬한 원색과 진함 먹선으로 그려져 시선을 모은다. 화면에 그려진 상항은 에로틱한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면 속의 배경은 그 시대의 기방[妓房]의 정경인 듯하다.






● 청루소일(靑樓消日) - 청루에서 시간을 보내다.
방 안에 여유로운 양반이 앉아있고 마루에는 생황을 든 여인이 있으며 전모를 쓴 기생이 마당을 들어서고 있는 적막한 오후 한 때의 기방 풍경을 그렸다.

간단한 선으로 그려넣은 단순한 배경에, 탕건(갓 아래에 받쳐 쓰던 관으로 말의 꼬리나 갈기털인 말총으로 만들었다)을 쓴 남자가 방안에 앉아 있고 생황(중국 묘족(苗族)이 만든 악기로 조선시대에 많이 수입되었다고 한다)을 든 기생이 앉아서 집으로 들어오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들어선 여인은 전모를 썼는데, 그 아래 검정 가리마(원래 궁중의 의녀들이 쓰던 것이다)가 보이고 있다. 어디 나들이 갔다 오는지 뒤따라 오는 아이는 보퉁이를 들고 있다.

따라오는 아이가 기생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키가 작아서, 어린아이라서, 기생보다 뒤에 위치해서 그럴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 그려진 고분벽화 등을 보면 중요하지 않은 시중드는 시녀같은 사람은 작게, 왕이나 그만한 지위의 인물 등 중요한 사람은 아주 크게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지만 이 그림을 보는 우리 같은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림 속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지켜봄으로써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그림 속 인물들 사이에 긴장감이 생기고 그 느낌을 우리가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혜원은 그림 속 등장 인물들의 감정을 그림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출처 : 소암조홍근)






● 홍루대주(紅樓待酒) - 홍루(주막, 술집)에서 술이 나오길 기다리다.







● 주사거배(酒肆擧盃) - 술판이 벌어지고 잔을 들어올리다.

주막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들과 주모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그러나 여느 주막과는 다르게 주변의 기와집과 마당 안의 매화도 보이는 것이 양반들을 상대하기에도 손색없는 꽤 반듯한 집 같아 보인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도 선비와 양반들인 듯. 매우 일상적인 조선시대의 한 생활상이다.


주사거배의 뜻은 ‘술집에서 술잔을 들다’ 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인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보여주는 술집이 기생집도 아니고 주막도 아닌 ‘선술집’의 풍경이란 점이다. 우리나라 회화 중 선술집을 묘사한 유일한 그림이기에 이 그림의 가치는 매우 높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점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헌에 의하면 고려 성종2년에 송도에 주점을 허가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민초들이 이용하는 현대적 의미의 주점은 조선 후기 숙종 때 본격적으로 널리 생겨났다. 조선 후기에 주점이 널리 퍼진 이유는 주점은 화폐 유통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화폐를 널리 유통시킬 목적으로 관용주점을 적극 활용했다. 그 후 화폐의 유통과 지역간 상거래의 발달로 술뿐 아니라 잠자리와 음식까지 제공하는 주막이 본격적으로 퍼져 19세기 조선 말기까지 전국 곳곳에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주막이 들어 서게 됩니다.

신윤복의 주사거배는 술과 간단한 음식, 잠자리까지 제공되었던 주막과는 다른 전문 술집의 일종인 ‘선술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대에도 ‘선술집’이란 곳이 많이 있는데 보통 ‘값이 저렴한 술집’ ‘값싼 안주에 간단히 한잔 하는 술집’ 이란 뜻으로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뜻이 아다. 선술집의 뜻은 ‘서서 술을 마시는 술집’ 이란 뜻입니다. 즉 얼마나 오래 마시거나 많이 마시는 것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서서 마시는 술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약 전부 서서 마시는 선술집에서 배짱 좋게 앉아 술을 마시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공공연하게 시비를 걸어 큰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림을 보더라도 그 누구도 앉아있는 사람이 없다.(찬솔갤러리)

-. 서서 갈비의 원조, 혜원 신윤복의 주사거배(소암 조홍근)






● 유곽쟁웅(遊廓爭雄) - 유곽에서 싸움이 벌어지다.
기방 문 앞에서 대판 벌어진 싸움 모습이다. 장죽을 문 기생은 구경을 하고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이 싸움을 말리고 있다.

유곽은 기생집을 말한다. 기생집 앞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왼쪽의 흐트러진 상투머리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싸움에서 진 것 같다. 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남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벗어던진 옷을 다시 입고 있다. 붉은 옷의 별감은 싸움을 말리며 진 사람을 다독이고 있나 보다. 오른쪽의 남자는 술이 취했는지 얼굴이 붉고 옷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다. 아마 싸움에 진 사람과 같이 한바탕 뒹굴었나 보다. 친구의 둥근 갓 양태와 대우(위로 솟은 부분)가 떨어진 것을 주워 들고 있다. 큰 가체머리를 한 기생은 누가 이기든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담뱃대를 물고 있다.

겉으로는 질서 잡힌 것처럼 보이는 사회도 이런 흐트러진 모습은 어딜 가나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혜원은 그러한 사회의 뒷모습을 이런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그들의 폐쇄성 때문에 이런 그림을 그린 혜원이 마땅 했을리가 없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도화서에서 쫓겨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흔히 말하는 춘화(春畵)도 그려주며 그의 인생을 그렇게 보낸 것이 아닐까 싶다.(찬솔갤러리)




<일상과 풍습>





● 단오풍정(端午風情) - 단오날의 풍경

음력으로 5월 초닷샛날은 단오(端午)라 하여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이래로 명절을 삼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부터 큰 명절의 하나로 지켜왔다. 이날이 되면 남자들은 씨름판을 별여서 힘내기를 하며 즐기고. 여인들은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를 뛰며 노는 것이 우리네의 전래풍속이었다.

이 그림은 단오날 추천놀이를 나온 한떼의 여인네들이, 시냇가에 그네를 매고 냇물에 몸 씻으며.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지금의 정릉이나 성북동 골짜기는 물론이고. 삼청동이나 인왕산 계곡을 비롯하여. 남산이나 낙산주변의 여러 골짜기들이 모두 이런 놀이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인적이 끊긴 후미진 곳이기에 마음놓고 저고리를 훌훌벗어 던졌지만. 미처 산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몰랐던가. 바위틈에 숨어든 상좌중 둘이서 기막힌 진경에 희희낙락 즐거워 어쩔줄을 모르니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혜원은 짐짓 화면의 초점을 딴곳으로 옮기려고. 그네 뛰는 여인에게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히고, 머리손질을 하는 여인에게는 엄청나게 큰 트레머리를 모두 풀어 놓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네 뛰는 여인의 다홍치마에 반회장 노랑저고리만으로도, 지극히 선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백설 같은 속옷이 반 넘어 내보이는 것은, 반라의 여인들에게서 훨씬 더 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찬솔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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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그림 중 특히 뛰어난 작품이다. 음력 5월5일 단오절의 여인네들의 풍속을 그린 그림인데 화면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3개의 인물군으로 전개되고 있다. 인물군의 하나는 화면 좌측 아래 부분에 그려진 몸을 씻고 있는 여인들. 화면 우측에 보이는 그네 뛰고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과 먹거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아낙이 이루는 인물군. 끝으로 화면 좌측 상부에서 여인네들을 훔쳐보고 있는 인물군이 있다. 이들 인물군을 살펴보면 배경을 제거하고 본다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산수배경의 효과적인 형태배치로 무리없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또한 구도상으로 훔쳐보고 있는 두 명의 중들은 없어도 무방하나 엉뚱한 인물이 삽입되면서 활기를 띠게 되며, 시각적으로 확장된 느낌을 준다.(소암조홍근)

-. 단오풍정'의 사미승







● 계변가화 (溪邊街話) - 시냇가의 이야기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그 옆을 지나는 젊은 사내의 아슬아슬한 감정을 표현했다.
계변가화는 빨래터의 여인들을 표현하여 김홍도의 '빨래터'와 많이 비교되는데, 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과 머리를 감고 빗고있는 여인, 그리고 큰천을 만지고 있는 나이가 좀 있어보이는 여인이 등장하고 이들을 훔쳐보고 있는 젊은 남자가 등장한다.남자는 활을 쏘다가 왔는지 손에 활을 들고 있고 고개는 아예 빨래터의 여인들에게로 돌아가 있는데 신윤복의 그림에는 이렇게 다른 각도에서 그림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이가 등장한다. 이러한 이들을 통해 작품의 선정성이 더 배가 되는거 같다.


신윤복의 이 화첩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내들이 멋있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빨래터 그림은 한명의 사내가 등장하는데, 아마도 무반의 자식인듯 활을 들고 어디론가 가는데, 그 옷을 입음새도 보통 세련된게 아니고, 풍채로 좋다. 떡벌어진 등어리를 화면 전면에 내놓고 가는 길에 멈춰서서 또 멋있게 고개를 돌려 머리 손질을 하는 여인내를 바라보고 있다. 이 여인내는 가슴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봐서 아들을 낳은 유부녀이다. 그럼에도 이 여인내는 사내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 싫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 위에 웃옷을 벗은 노부는 뭔가를 개고 있고 그 밑으로 아낙내는 방망이질을 하고 있다. 암석의 처리, 물가의 처리 등이 상당히 깔끔하고 아름답다. 







● 정변야화 (井邊夜話) - 야심한 밤 우물가에서 수다를 떨다.
어스름 봄밤에 우물가에서 일어난 일을 그린것으로 물을 길러 온 두 여인이 춘홍이 오른 듯 보름달 아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돌담 뒤에서 음흉한 양반이 두 여인을 몰래 훔쳐보고 있다.

그림 위쪽에 둥근 달이 떠 있다. 밤이다. 달이 걸린 나무를 보시라. 붉은 꽃이 피어 있다. 식물에 대해 무지한 나는 저 꽃이 앵두꽃인지, 복사꽃인지 모른다. 그림 아래쪽에는 젊은 여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 여자는 우물가에 앉아 두레박 줄을 잡고 있고, 서 있는 여자는 오른손을 턱에 괴고 고민에 빠진 눈치다. 무언가 심각한 사건이 있다.

고민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림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찾아볼 수 있는 데까지는 찾아보자. 두 여자는 양반집 여자가 아니다. 옷차림을 보라. 둘 다 행주치마를 두르고 있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있는 여자는 흰 민짜 저고리를 입었다. 왼쪽 여인은 녹색 저고리이기는 하지만, 저고리 고름만 자주색일 뿐 다른 장식이 전혀 없다. 또 신은 모두 짚신이다. 초라한 복색으로 보아 두 여인이 양반집 여자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두 사람 여인네는 왜 고민에 잠겨 있는 것인가. 우물이 있는 장소를 보자.

그림 오른쪽 상단에 기와를 얹은 작은 문이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아니다. 큰 양반 가문은 건물이 크고 복잡하며 중간에 무수히 작은 문들이 있다. 이 문 역시 그런 문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담장이다. 담장이 허물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묵은 양반가로 생각되는데, 그 담장에 사내가 하나 서 있다. 사내가 쓰고 있는 양반만이 쓰는 사방관으로 보아, 이 사내는 이 집의 주인 양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내는 훔쳐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꼿꼿이 서서 두 여자를 정시하고 있다. 다만 이 사내의 표정은 음침하다. 주인 양반이 왜 밤중에 집안 여자들이 우물가에 모여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단 말인가. 두 여자는 왜 물을 긷다 말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가, 또 서 있는 여자는 왜 턱까지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있는가. 그림은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이 남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혜원이 그림 속에 담은 생각이 무엇인가 늘 궁금하였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으면 상상이다. 담 넘어 서 있는 양반이 서서 고민에 빠져 있는 젊은 여인을 건드렸고, 첩으로 들이려 하자, 그 사실을 여인은 동무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임신을 시켰든지. 이 그림은 바로 그 고민상담의 장면이라는 것이다. 양반은 이런 이유로 서 있는 여성에게 무슨 제안을 하였고, 그 여성에게 하회를 기다리는 중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이런 해석이라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꼭 그렇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고민에 빠진 여성과 돌담 밖의 남자 사이에 어떤 성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추리하는 것은 그리 근거 없지는 않을 것이다. (찬솔갤러리)






● 노상탁발(路上托鉢) - 중이 길위에서 시주를 청하다.

탁발은 승려들이 마을로 돌아다니며 동냥하는 것을 말한다. 큰 북은 법고라고 하는데, 대개 아침, 저녁 부처님에게 예를 올릴 때 두드린다. 그림에 나타난 것을 보면, 거리에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탁발을 하기 위해 법고를 치고 있다. 승려들은 모두 네 사람인데, 법고를 두드리는 사람만 깎은 머리이고, 목탁을 치는 사람은 탕건을 쓰고, 꽹과리를 치는 사람은 패랭이를 썼다. 고깔을 쓰고 고개를 숙여 절하는 사람은 손에 부채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승려들이 입는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장삼이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걸쳐 입는 가사 등을 입지 않았다. 승려들이 평소에 입는 옷은 일반 사람들이 입는 옷과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거리에서 하는 탁발인데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 않았다니 뭔가 이상하다. 승려도 아니고 일반 서민도 아닌 사람들을 거사라고 하는데,  이들은 광대같이 북과 징을 울리며 입으로 염불도 외우면서 부적 같은 것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고깔 쓴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부적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믿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절의 살림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절에서는 이런 거사들에게 거리에서 탁발도 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도움도 주는 즉, 절과 이들 거사들의 관계는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이들은 자기들끼리 절도, 집도 아닌 건물을 짓고 사주, 관상, 손금보기 등을 해 주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쟁이 끝나고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절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런 일들을 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는 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한 무리의 여인네들이 길을 가다가 이들의 염불소리에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다. 여인 가운데 흰 색의 장옷을 입은 여인을 자세히 보자. 겉으로 나온 부분은 흰 색이고 안으로 들어간 부분은 푸른색을 띠고 있고, 그 옆에 장옷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도 윗부분은 흰색이고 안으로 접혀 들어간 부분은 푸른 색이다(사진에선 잘 안보이지만). 오른쪽의 푸른색 장옷을 쓴 여인의 파도치는 듯한 장옷 끝자락은 모두 흰색이다. 즉 장옷의 안감은 흰색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장옷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옷을 겉과 안을 다른 색으로 만들어 평상시에는 색이 있는 부분으로 쓰고 다니다가 상을 당했을 때는 뒤집어서 흰 천이 나오게 쓰고 다닌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각각의 장옷을 따로 만들 필요없이 하나로도 상황에 맞게 사용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부유하거나 사치를 즐기는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겠지만 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일반 서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왼쪽 아래 선비가 손에 사선(紗扇 - 부녀자들과 마주치면 얼굴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들고 다녔다고 한다)을 들고 길을 지나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찬솔갤러리)






● 표모봉욕(漂母逢尋) - 세탁하는 여인이 찾아온 이들을 만나다.

내가 그림을 제대로 읽는 건지 모르겠다. 스님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탕건이며 옷이며 나뒹굴고 있는게, 글쎄 무슨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난 스님이라고 생각했다. 10대 후반의 어린 스님이 빨래터를 훔쳐보다가 그만 노부에게 걸려서 붙잡혀서 오는데, 노부가 때리는 매를 드센 힘으로 잡고 있다. 어쨌든 끌려나오고는 있는데, 빨래하던 여인은 무지 화가 났다는 표정이다. 자세도 그렇거니와, 몽둥이질좀 당해보라는 자세다.

이 그림에서 돋보이는것은 산수이다. 신윤복의 좋다고 할만한 산수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부벽준을 친 바위는 전반적으로 깔끔하다. 도회풍경을 주로 그린 신윤복이라 그런지 산수조차도 도회적인 느낌이 난달까. 뭔가 간단하면서도 깔끔하면서도 세련되고 마치 일종의 좀더 디자인된 산수를 보는 듯하다. 풀이 무성하고 아마도 한 여름인듯. 






● 무녀신무(巫女神舞) - 무당이 신들린 춤을 추다.

민가에서 굿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옛 조선시대의 무속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갓을 쓰고 부채를 손에 든 무당이나 무당 앞쪽에 앉아 쌀이 담긴 소반을 앞에 놓고 비는 여인의 모습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붉은 옷을 입은 무녀는 대단히 풍채가 좋은 여인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굿판을 압도하는 무당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한편 화면상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리고 강하게 시선을 끄는 하나의 포인트로서 더 크고 풍성하게 표현한 것 같다.

화면은 사선으로 가로지른 돌담을 경계로 이분되어 있는데 돌담 바같쪽은 이웃집 초가지붕과 나무들로 배경이 되고 돌담 안쪽으로 바짝 붙은 위치, 즉 화면의 정 중앙에 여러 인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고 무녀는 좀 떨어진 오른쪽에 혼자 두드러지게 배치 되어있다. 모두 진지하게 굿에 열중해 있는데 뒷편에 앉아 있는 며느리인듯한 여자는 고개를 돌려 담장 밖에서 안을 넘어다 보는 남자와 시선을 맞추고 있다.이것은 신윤복의 다른 그림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춘정(春情)을 소재로 한 익살스러운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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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앉은 여인의 소반(작은 상)위에 흰 쌀이 담겨 있고 여인은 두 손을 모아 빌고 있다. 이들 일행은 모두 서민의 여인들로 보인다. 노랑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턱을 괴고 무당의 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뒤에 쓰개치마를 입은 여인은 돌담 밖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춤추는 무녀 한 명과 피리 불고 장구 치는 박수(남자무당)가 한 명씩 이다. 보통 굿은 여러 명의 악공으로 이루어지는데, 제물이나 참가한 사람의 수로 보아 작은 굿으로 보인다. 무녀는 주름진 붉은 철릭을 입고 있어 그 화려함이 돋보이고 왼손에 든 부채에는 금강산 그림인가 싶은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원래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유교를 택하였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거나 굿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중종의 왕비였던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보우를 궁궐로 불러들여 불사(佛事)를 벌이기도 하였다. 비록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여 공식적으로 행사를 하지는 못했으나 왕실에서조차 공공연하게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였으니 일반인들에게 법으로 금한들 그것이 제대로 먹혀 들어갈리가 있으랴. 갈수록 폐단이 심해지자 정조는 승려나 무당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아 성안으로 드나드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도성 밖에서 비밀리에 행해지는 것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는 법. 어쨌든 서민들에게는 굿이 하나의 재미난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담 밖에서 구경하는 남자가 바로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에서 금지하는 굿을 비밀리에 하는 이들이 못마땅한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이것을 의식한 쓰개치마 입은 여인은 그런 남자를 겸연쩍은 듯이 바라보고 있다. 남자는 맨 상투로 보아 천민신분이 아닐까 싶은데 그 신분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에 대한 불만도 섞여 있으리라. 혜원의 그림에는 이렇듯 그것을 관찰하고 구경하는 사람을 그려 넣어 그림을 보는 우리가 마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찬솔갤러리)



<만남>





● 연소답청(年少踏靑) - 젊은이들의 봄 나들이 

답청(踏靑)’은 ‘푸른 풀을 밟는다’는 봄나들이를 뜻한다. 우리나라 겨울은 춥고 길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산야에 파릇파릇 기운이 돌고, 진달래가 붉게 피어날 무렵이면 봄나들이 충동을 느끼는데, 이 그림은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듯.


조선조의 후기문화가 황금기를 이루고 있던 시대에. 서울 장안의 귀족생활은 아마 가장 호사가 극치를 이루었을 것이다. 따라서 귀문(貴門)자제들의 행락도 어지간히 극성스러웠을 듯한데. 이 그림은 그 시대를 산 신윤복의 붓을 통하여 그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겠다.

진달래꽃 피는 봄철이 되자 협기 만만한 반가(班家)의 자제들이 장안의 기녀들을 대동하고 간화답청(看花踏靑)의 봄나들이에 나섰는데. 이들의 옷차림은 장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멋을 부리고 있다. 보라색과 옥색 천으로 발 굵게 누빈 저고리에 향낭(香囊)을 달아 차고, 홍록의 갖은 주머니를 긴 띠매어 치레하며. 행전은 짧게 치고, 중치막의 앞 두 폭을 뒤로 잡아매어서 뒤폭만 꼬리로 늘이어 걸음마다 나풀거리게 하고 있다.

장안 명기들의 미태(美態)에 홀딱 빠진 양반자제들은 체면불구하고. 말탄 기생에게 시중드느라 담뱃불을 붙여 대령하며. 구종되기를 자원하여 갓을 벗어 마부 주고, 마부 벙거지를 제가 쓰고서 검은띠를 허벅대님으로 매고, 말고삐를 잡고있다. 한 친구는 시간에 늦었는지. 갓을 벗어 짊어지고 옷자락에 바람 일며, 동자 구종을 몰아 급히 달려오는데. 나귀탄 기생의 초록 장옷도 깃발처럼 나부낀다. 암벽에는 진달래나무인 듯 분홍꽃을 가득 피운 나무들이 군데군데 있고. 구름 같은 기생의 트레머리에도 그 꽃가지가 꽂혀있다. 물빛으로 갈라 놓은 삼거리 주변의 청태점(靑苔點)이 분분하여 답청이 실감된다.(찬솔갤러리)






● 휴기답풍(携妓踏楓) - 기녀를 태우고, 단풍을 밟고 지나간다.

쓰개치마를 두른 여인은 담뱃대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생인 것 같다. 쓰개치마는 원래 양반집 여인들만 쓰도록 했지만 이 때쯤에는 별로 이런 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지붕이 있는 가마는 아무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양반집 여인들만 탈 수 있었다. 지붕이 없는 탈 것을 가마바탕이라고 하는데 기생이나 첩이 타고 다녔다. 가마를 멘 두 사람은 어깨에 가마 무게를 지탱하는 줄을 메고 있고 손으로 가마의 자루를 잡고 있다. 이것이 가마를 메는 방법이란다. 뒤에 있는 댕기머리 총각은 단풍잎을 꽂았고, 앞의 가마꾼은 벙거지를 쓴 것으로 보아 결혼한 사람인 것 같다. 가마바탕 위에 올라앉은 기생은 좀 나이가 들어 보인다. 

(洛陽才子知多少) "낙양의 멋쟁이들 많고 적음을 안다."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즉 서울의 멋쟁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처음 보나 보다. 가던 길에서 고개를 돌려 노골적으로 얼굴을 쳐다보는 것을 보니... 뒤에서 가마를 메고 오는 젊은이도 기생을 따라다니며 또래의 많은 멋쟁이들을 보았겠지. 허나 그도 낯선듯 기생과 함께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벙거지를 쓴 사람은 결혼을 해서인지 아니면 기생을 태우고 다니면서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해서인지 또 다른 멋쟁이에 대한 관심을 접은지 이미 오래된 것 같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기고 있다. 뒤의 댕기머리 젊은이는 아직은 또래의 멋쟁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과 다른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가리라. 

이들과 상관없이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기생은 이성으로서의 호기심이 아닌  또 다른 멋쟁이에 대해 '어? 내가 서울장안의  멋쟁이들은 꽤나 많이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은 처음보는데!' 하는 단순한 호기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중치막 입은 멋쟁이 젊은이는 길을 가다 기생의 눈길을 느꼈는지 마주보고 있다. 젊은이는 가던 길을 멈춘 듯 발걸음이 멈칫하면서 약간 옆으로 비켜섰다. 바람이 부는지 갓을 잡은 손과 휘날리는 갓끈에 젊은이의 모습이 더욱 멋있어 보인다. (출처 : 소암 조홍근)






● 문종심사(聞鍾尋寺) - 종소리를 듣고서 절을 찾아가다.

“소나무가 많아 절은 보이지 않고, 인간 세상에는 다만 종소리만 들린다.”

말잡이 하는 아이까지 데리고, 보퉁이를 든 하인이 뒤따르고 절에서 나온 고깔 쓴 승려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꽤나 권력이 있는 집 여인인 것 같다. 사람들이 다니며 정성을 드리는 돌무더기 앞까지 나와서 마중을 하고 있으니, 여인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보다. 꽤나 지체가 높은 양반집 여인인가보다. 그 신분을 말해주듯 점박이 말 위에 올라탄 여인의 저고리는 삼회장이다. 삼회장 저고리는 소매끝(끝동이라 함)과 깃(저고리 동정 밑), 겨드랑이 옆 곁마기와 고름을 저고리와 다른 색으로 장식한 것을 말한다.

머리에 쓴 것은 너울로 보인다. 너울은 삿갓같은 테두리에 천을 통으로 씌워 뒤집어쓰게 되어 있다. 지체 있는 양반집 부인들은 다닐 때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이 너울을 쓰고 다녔는데, 눈 있는 부분만 얇은 망사 같은 천으로 만들어 보일수 있게 했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자 앞을 가로막은 너울이 답답했나 보다. 뒤집어 머리 뒤로 넘겨버렸다. 조선 초에는 부인이 나들이할 때는 조롱말을 타고 면사(面紗-얼굴가리개)를 하고 말군(襪裙)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번거로워서인 듯 잘 지켜지지 않은 듯하다. 말군은 부녀복 중 존자(尊子-지배층)의 옷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말군의 형태는 성종조에 펴낸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 그 형태를 뚜렷이 볼 수 있단다. 그것은 통 넓은 가랑이가 있는 바지형으로 뒤가 터져 있어 입고 벗기 편하도록 한 모양이란다. 허리끈 외에도 어깨끈이 하나 달려 있어 흘러내림을 막았단다. 치마 위에 입어도 부리만 오므리면 충분히 너그러워 입고 말을 타면 치마가 펄럭이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단다. 그러나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조선시대 사람들은, 특히 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온갖 구속과 규율에 얽매여서...).

그림에 보이는 여인은 아마도 말군을 입은 듯 한데, <연소답청>에 등장하는 기생들로 보이는 여인들은 말을 탔음에도 말군을 입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어서 입지 않았다. 이들은 가슴말기를 하고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었기 때문에 고름이 밖으로 나와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종심사>의 여인의 저고리 고름은 겉에 있는 천으로 가려진 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치마 겉으로 무엇인가를 덧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말군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왼쪽을 비워놓고 돌무더기 앞에 나무 한그루, 오른쪽으로 떨어진 곳에 커다란 바위와 절로 가는 길을 그려놓았다. 그 안에 홍살문 끝이 보인다. 원래 홍살문은 궁궐이나 관청, 왕릉이나 묘, 사당 등의 입구에 세워 놓는, 붉은 칠을 한 일종의 나무 기둥문이다. 절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해서 문은 없고 지붕만 있는 문을 세워 놓는다. 어디로 들어가는 것인지 홍살문만 보이고 일주문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절까지 가려만 한참 멀었나 보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택하여 불교를 믿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불교를 갑작스럽게 믿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왕실에서조차 드러내진 못하였어도 지속적으로 불사(佛事)를 벌였으니 일반서민들에게는 오죽하랴. 지체높은 이 여인은 나들이 삼아, 바람 쐬러 절에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깥 나들이가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불사를 드리러 절에 간다는 것은 바깥 세상을 구경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핑계거리였던 것이다. (찬솔갤러리)






● 이승영기(尼僧迎妓) - 비구니가 기녀를 맞이하다.

버드나무 가지에 새 잎이 돋는 봄날, 장옷을 입은 여인과 보퉁이를 든 여인이 절에 찾아가는 그림이다. 대삿갓을 쓴 여승이 웃으며 맞이하고 있고, 가까이 개울을 그려 넣고는 다른 배경은 과감히 생략해 버렸다. 장옷은 원래 서민의 여인들이 외출할 때 입고 다니는 옷이다. 치마여밈을 보자. 양반집 여인들만이 왼쪽으로 여미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이는 장옷 입은 여인은 치마를 오른쪽으로 돌려 여미고 있다. 기생이 아니면 서민 가운데 부잣집 여인으로 보인다. 이상하게도 뒤 따라오는 여인이 양반집 여인들의 치마 여밈을 하고 있다. 즉 앞선 여인과 그 하인으로 보이는 여인의 치마 여밈이 바뀐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신윤복이 김홍도처럼 그림을 바꿔 그렸을까? 이것은 당시 사회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는 이미 조선후기로 신분질서가 무너져 일반 서민들도 장사 등으로 큰 부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돈으로 양반직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리 양반집이었다고 해도 재산이 넉넉하지 않은 이상 벼슬에 오르는 사람이 없으면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즉 먹고 살기 위해서 남의 집 일을 돌보는 사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양반들은 하층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당시 조선후기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그림을 보자.

여기 하인으로 보이는, 보퉁이를 든 여인은 가난한 양반집 여인으로 남의 일을 돌보고 있지만 그 자신 양반출신이라는 것을 드러내 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기생의 시중을 들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장옷을 입은 여인은 부잣집 서민의 여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신분사회가 급속히 무너져 내린다 해도 뿌리 깊게 내려온 습관과 관습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 그림은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고려시대를 부정한 조선은 그 사회의 모순이 불교가 거대화되면서 권력화한 것도 한 역할 했다고 보았다. 즉 불교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이념으로 유교를 선택, 신라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불교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왕실에서조차 지켜지지 않았으니 일반 백성들에게는 더 말할게 무엇이랴. 거대화, 권력화하면서 발생되는 부정과 퇴폐는 필연이자 모든 문제의 근원.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오히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산사에 기도하러 간다고 하는 것은 외적으로 명분이 서는 일이었고 내적으로도 하나의 커다란 탈출구였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근절시키고자 했으나 그것은 법으로도 막지 못했다. 아들 낳기 위한 기도를 하러 간다는데 누가 막을 소냐.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양반출신으로서 남의 집 일을 봐 주는 입장에서 가뜩이나 못마땅한 여인은, 절에 가는 여인과 맞이하는 승려의 봄날 화사한 햇살 같은 밝은 얼굴과는 반대로 현재의 자기 처지가 얼마나 못마땅할까. 자신의 집안이 한창 좋았을 옛날이었으면 그 입장이 바뀌었을 텐데...  부러움과 시샘이 겹쳐 얼굴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찬솔갤러리)






● 노중상봉(路中相逢) - 길에서 마주치다.

路中相逢이 아니라 葬禮之後

길에서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남자 둘과 여인 둘.
모두 장식이 없는 흰 옷을 입고 있다. 남자들이 쓴 패랭이는 집안사람 가운데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쓰는 모자이고 여인들의 삿갓도 그렇다. 오른쪽의 삿갓 쓴 여인은 치마 여밈이 왼쪽으로 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집 여인 같다. 왼쪽의 삿갓을 들고 있는 여인은 치마 여밈이 다르지만 얹은머리가 작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서민 같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상을 당하면 죽은 사람과의 촌수에 따라 흰 옷을 입는 기간과 지팡이를 짚는 것도 달랐다고 한다. 지팡이는 슬픔으로 인해 제대로 지탱할 수 없는 몸을 의지한다는 뜻으로 짚었단다. 하늘을 나타내는 위를 둥글게, 땅을 나타내는 아래는 네모지게 깎아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하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생각을 담고 있단다. 

부모 모두에 대해서는 지팡이를 짚는 3년상이 원칙이지만, 남자쪽만 지팡이를 짚는 1년상일 경우는 몇가지가 있다. 남자쪽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계실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입기도 한 경우가 그 하나요, 아버지가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해서 입기도 한 경우가 그 둘이다(나머지는 너무 복잡해서 생략). 딸의 경우 시집가기 전에는 부모상에는 지팡이 짚는 3년상이 원칙이고, 시집간  딸은 친정부모에게 모두 지팡이를 짚지 않는 1년상을 입는다. 즉 여인 입장에서 보면 시부모상일 때는 지팡이를 짚었지만 시집가서 당한 친부모상일 때는 지팡이를 짚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왼쪽의 여인은 시부모 상을, 오른쪽의 여인은 친부모 상을 당한 것이다. 지팡이로 보아  남성우위 사상을 엿볼 수 있다.(조선시대 상례(喪禮)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니 번역되어 정리된 것임에도 왜 이리 복잡한지...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 복잡한 일상에서의 법칙과 규칙을 어떻게 다 지키며 살았을까.)  

왼쪽 지팡이를 짚은 쪽과 짚지 않은 쪽은 서로 한쌍의 부부로 보인다. 즉 지팡이를 짚은 쪽의 남자와 지팡이를 짚지 않은 여인이 남매인 것으로 추측된다. 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은 소매부분이, 남자는 겉옷 아랫단과 소매가 구불거리는데, 아마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슬픔을 이렇게 표현한 것 같다. 이들 남매는 집안이 몰락한 가난한 양반집 사람들 같다. 집안이 가난해서 남자는 서민의 여인과, 여동생은 서민의 남자와 결혼을 했나 보다. 지팡이 짚은 남자의 소맷자락이 넓은 것과 담뱃대 물고 있는 남자의 폭 좁은 소매가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왼쪽의 남자가 입은 옷은 두루마기로 보인다. 터진 곳이 없이 막혔다는 뜻으로 주의(周衣)라고도 한단다. 

조선후기에는 상류층에서 집에서 입거나 외출할 때 겉옷 안에 받쳐 입던 옷이고, 하류층은 외출복으로 입었단다. 두루마기의 소매를 넓혀서 광수주의(廣袖周衣, 넓은 소매의 주의)로 만들어 외출복으로 착용하였단다. 1884년(고종21) 의복개혁 이후 두루마기는 삼국시대처럼 남녀, 귀천 없이 입게 되었는데, 갑자기 시행한 의복개혁은 상류층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10년 후에는 모두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한다. 이 때는 고종 이전시기로 하류층에서도 몰래 두루마기를 입었다고도 하지만 왼쪽 남자의 두루마기는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 무척 낡아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즉 그의 두루마기가 집안에 물려 내려오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젊은 남자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아내의 오빠를 신경 쓰지 않고 담뱃대를 물고 있다. 예의에 얽매이지 않는 신분이라서 그런가 보다. 남자 둘이 등에 진 물건에서 북을 두드리는 채 같은 것이 보인다. 광대무리에서 만나서 처남과 매제로 인연을 맺었는지도 모르겠다. 양반출신 광대를 비가비(비개비, 비갑이) 광대라고 하는데 아마 신분이 몰락하면서 이런 류의 사람들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런 용어도 생긴게 아닐까 한다. 삿갓 쓴 여인이 손에 든 것은, 상을 당한 사람들이 부모 잃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가리려는 목적으로 들고 다니던 베로 만든 부채인 ‘포선(布扇)’이다. 

이 그림은 『혜원전신첩』에 실려있으면서도 유독 여러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양반과 기생의 노골적인 유희장면 등으로 대표되는 혜원에 대한 선입견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혜원전신첩』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그림들은 이러한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할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리. 그러나 이 그림은 글로 쓰여진 역사 기록물을 머리속에서 상상하여 표현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확인하여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조선시대 상례문화의 일부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정말 귀중한 그림자료이다. 

당시 별 생각없이 그렸을지도 모르는 혜원의 많은 그림들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먹고 입었으며, 어떻게 생활했는지 가르쳐 주고 있다. 조선사회에서 관심 밖에 있던 여성들, 특히 기생들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파격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가 밖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여성들은 양반집 부인네들이 아니라 기껏해야 기생들과 신분이 낮은 여인들이었을 테니까. 





이 그림의 제목이 노중상봉이라고? 아니다. 이 그림은 '장례지후(葬禮之後)' 나 '장례를 마치고' 로 고쳐야 한다. 아마 『혜원전신첩』이 처음 발간될 때 붙여졌던 제목이 그림에 대한 연구가 되지 않은 상태라 지속되어진 듯하다. (소암조홍근)



<연인들>





● 춘의만원(春意滿園) - 봄기운이 온곳에 만연하다.

물이 오른 파릇한 새싹들이 삐죽 잎을 내민 봄빛이 가득한 어느 날, 나물 캐러 들로 나간 여인의 바구니를 덥석 잡은 저 남자는 누구일까? 띠를 맨 부분에 주름이 잡힌 것으로 보아 철릭을 입었다. 철릭은 원래 웃옷과 아랫부분을 따로 재단해서 허리에서 붙인 옷으로 군복의 일종이었다. 철릭은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과 무당들, 왕이 밖으로 행차할 때 옆에서 호위하는 무관이 입었다.

조선초기에는 웃옷과 아랫부분의 비율이 거의 같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아랫부분이 두 배 이상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여성들의 가체(만들어 올린 머리) 등이 유행하면서 함께 남자들의 옷도 그 모습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한다. 술을 마신 듯 얼굴이 붉은 남자는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벼슬아치 즉, 무관으로 보인다. 얹은머리가 작지 않은 여인은 서민층인 것 같다. 서로 아는 사이일까? 여인은 남자가 바구니를 잡고 수작 부리는 것이 싫지 않은 듯한 표정이다. (허접거사)






● 소년전홍(少年剪紅) - 젊은이가 진달래꽃을 꺽는구나.

엉덩이를 살짝 빼고 있지만 잡힌 손이 싫지만은 않은 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띄어있다.





● 월하정인(月下情人) - 달 아래에서의 두 연인

초승달 지는 깊은 밤 한껏 차려 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 무슨 일일까? 다소곳하게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은 수줍음 반 교태 반 야릇한 정이 볼에 물들었다. 저고리 깃과 끝동의 보랏빛이 옥색 치마 아래 진자줏빛 신발과 어울리고, 치마와 동색인 한층 연한 쓰개치마 맵시가 곱기도 하다. 그윽한 눈길을 건네는 사내는 오른손에 초롱 들고 왼손으로 허리춤을 뒤적인다. 애틋한 정표라도 전하자는 것일까? 도포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긴 갓끈은 멋들어지게 어깨에 걸쳤는데 마음은 진작부터 초롱불 속처럼 뜨듯해서 발끝이 벌써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내로라 하는 장안의 한량인 사내의 가죽신은 코와 뒤축에 따로 옥색을 댄 호사스런 것이다. 여인은 치마를 묶어 올려 하얀 속곳이 오이씨 같은 버선 위로 드러났다. 아마도 함께 갈 낌새지만 안 그럴지도 행여 알 수 없다. 달빛이 몽롱해지면서 두 사람의 연정도 어스름하게 녹아든다. 배경이 뽀얗게 눅여져 있으니 섬세한 필선과 화사한 채색으로 그려진 두 연인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신윤복은 이 정황을 풍류 넘치는 흐드러진 필치로 이렇게 적었다.
‘달도 기운 야삼경/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 (月沈沈 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화제(畵題)도 기막히지만 글씨 주위와 옆 건물 벽을 반쯤 여백으로 처리한 솜씨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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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정인〉은 깊은 밤에 두 남녀가 밀애(密愛)를 즐기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그의 다른 그림에 비하면 훨씬 점잖은 축에 속한다. 벽체가 허물어진 집, 침침하고 요염한 초생달, 나무와 담장 위를 감싸고도는 밤안개 등이 야반 삼경의 스산하면서도 은밀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두 연인의 만남의 장소를 후미진 담모퉁이로 설정한 것도 은밀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의도라고 보아진다.

화면의 주인공은 행색으로 보아 한량과 기생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량은 두 발의 방향이나 초롱을 든 손의 움직임으로 보아 어디론가 기생을 유혹해 가려고 재촉하는 듯한데, 기생은 자신의 마음을 선뜻 정하지 못하고 있는 듯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표정만 짓고 있다. 그러나 기생의 참외 씨 같은 두 신발의 방향은 이미 한량을 향해 있고, 장옷을 가다듬는 작은 손에는 교태가 흐른다. 이 얄미운 여인의 속마음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월침침야삼경 양인심사양인지(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는 화제(畵題)가 말해 주고 있듯이, 오직 두 남녀만이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월하정인>은 동구 밖의 후미진 곳에서 여인이 외간 남정네와 밀어를 속삭이는, 어쩌면 부도덕하기까지 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창하고 아름다운 필선과 고상하고 담박한 색채를 구사한 신윤복의 붓질로 인해서 그림은 결코 잡스럽거나 난잡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유려하고 아담한 필선과 색채로 묘사해 낸 여인의 모습은 한국 여인의 골격과 표정을 그대로 살려 놓았다.

남녀간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속된 것으로 비쳐 질 수도 있다. 더구나 유교적 전통의 껍질을 쓰고 있었던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한량과 기생간의 사랑은 감히 드러내 놓고 미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신윤복이 〈월하정인〉과 같은 내용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 그가 기생이나 한량들과 어울리면서 사랑과 풍류, 생활의 멋과 해학,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 감정의 진실을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찬솔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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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옛말에 ‘늙어 기첩(妓妾)을 두면 반드시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승을 지낸 김명원이 젊어서 화류계에서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만 사랑하는 기생이 권문세가의 첩이 되고 말았다. 그녀를 잊지 못한 명원이 어느 날 밤 담을 넘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크게 경을 치게 되었다. 때마침 형 경원이 급히 달려와 소리를 쳤다.

“내 아우가 기운이 호탕하고 몸가짐은 거칠어 공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그러나 아우는 평소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뒷날 크게 쓰일 인물입니다. 공께서는 아녀자 일로 나라의 인재를 정녕 죽이시렵니까?” 그러자 주인은 결박을 풀고 후히 술을 대접해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데 김명원을 끌어댄 것은, 화제로 쓴 시구가 들어 있는 한시를 그가 지었기 때문이다.

창 밖은 야삼경 보슬비 내리는데,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리라.
나눈 정 미흡해서 날 먼저 새려 하니, 나삼(羅衫) 자락 부여잡고 뒷기약만 묻네
(窓外三更細雨時 兩人心事兩人知 歡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問後期)


예나 지금이나 남녀간의 일은 갈피도 많고 두서는 없으며 반드시 은밀하게 마련이다. 신윤복은 그러한 남녀간의 정을 주제로 한 그림의 명수였다.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소설 한 편보다 더 소상하다.






● 월야밀회(月夜密會) - 달이 뜬 야밤에 몰래한 만남

그림 오른쪽에는 장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있고, 왼쪽에는 어떤 사내가 역시 여인과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다. 흔히 이 장면을 두고 조선 최초의 키스신이라며 흥분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남성과 여성의 입술이 이렇게 근접해 있는 그림은 조선시대 최초의 것일 게다.

이 그림의 시간은 왼쪽 위편에 달이 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밤중이다. 길 양쪽의 담장은 모두 기와를 얹었고, 오른쪽 담장 안은 거창한 기와집이다.  이 한밤중에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포교밖에 없으니, 이 그림은 포교가 밤에 서울의 고급 주택가를 순라 도는 장면인 것이다. 그런데 그림에 여자가 둘 등장하는 것이 몹시 흥미롭다.

책에서 이 다음 부분은, 두 여인의 복식으로 신분을 추측하는 내용이다. 담장 뒤에서 두 남녀를 엿보고 있는 젊은 여인의 신분은,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기녀이다. 포교가 안고 있는 여인은, 남편은 물론 자식까지 있는 민간의 부녀자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이 세 사람이 어떤 관계이며, 이 장면이 어떤 상황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야기를 지어 내어 상상하는 것은 보는 사람 마음이기에.... 담장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화가의 시선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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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인적이 끊어지고 보름달만 휘영청 밝게 비치는 야밤중에. 골목길 후미진 담그늘 아래에서. 남녀가 어우러져 깊은 정을 나누고 있다. 남자의 차림새가 전립(氈笠)을 쓰고, 전복(戰服)에 남전대(藍纏帶)을 매었으며. 지휘봉 비슷한 방망이를 들었으니, 어느 영문(營門)의 장교일시 분명한데. 이렇듯 노상에서 체면없이 여인에게 허겁지겁하는 것은, 필시 잠깐밖에는 만나볼수 없는 사이인 때문일 것이다.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버린 옛 정인(情人)을 연연히 못 잊어, 줄이 닿을 만한 여인에게 구구히 사정하여 겨우 불러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지만. 여기서 이렇게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듯하다. 이쪽 담모퉁이를 도는 곳에 비켜서서, 동정어린 눈길로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은, 밀회를 성사시킨 장본인인 것 같다. 차림새가 여염의 여인은 아닌듯 하여, 장교를 만나고 있는 여자의 전력(前歷)도 대강 짐작이 간다.

조선시대의 화류계를 주름답던 사람들이, 대개 각영문의 군교(軍校)나 무예청(武藝廳)의 별감(別監)같은 하급 무관들로서, 이들이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상기할 때. 군교 차림의 이런 애틋한 밀회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찬솔갤러리)







● 야금모행(夜禁冒行) - 심야에 금지된 비밀 나들이

초승달이 떠 있는 밤, 노란 초립 아래 추위를 막기 위한 풍차를 쓴 붉은 옷의 별감이 손짓하며 뭐라고 하고 있다. 갓 쓴 양반과 긴 담뱃대를 문 기생은 모두 누비로 된 저고리와 속바지를 입었고 손에는 바람이 들지 말라고 토시를 끼고 있다. 초승달이 기운 것을 보니 밤이 한참 된 것 같다.

기생은 궁중에서 필요할 때마다 전국에서 뽑아 올렸으나 숙식은 혼자 해결해야 했다. 이것을 해결해주는 일단의 무리들을 기부(妓夫)라고 하였다. 이 둘은 서로간의 이익을 나누는 관계를 지속하다가, 기부는 차츰 기생의 남편이라는 역할과 함께 그들을 관리하는 위치로까지 확대되어간 듯하다. 이들의 관계를 공생(共生)이라고 해야 할까? 기부의 역할은 중인계층의 무리들, 즉 시중의 한량이나 별감 같은 하급 군인계층과 양반가의 서자 등(흔한 말로 왈패, 왈짜)도 그 한 축을 이루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양반과 기생이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 것을 별감(여기서는 기부로 보인다)이 배웅하는 것 같다. 바람 매운 이 겨울밤에 무슨 일로 길을 재촉하는 것인가? 오른쪽에 그려진 길 안내 맡은 작은 아이는 길 밝히는 등과 추위 막을 털모자를 들고 있다. 기생이 물고 있는 긴 담뱃대는 갈 길을 재촉하는 듯 아이를 가리키고 아이는 시선을 되돌려 가야할 길을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듯하다. 중요하지 않은 듯 작게 그려 넣은 아이의 시선은 그림에 긴장감을 주고 있다.

혜원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 작게 그려진 아이, 그림 전체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지 않아 작게 그려진 아이지만 항상 관조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혹시 혜원 자신을 투영시킨 것은 아닐런지...  (찬솔갤러리)
 



<탐욕>





● 이부탐춘(嫠婦耽春) - 과부가 색을 탐한다
이부는 과부를 뜻하니 소복을 입은 여인이 마당에서 짝짓기 하는 개와 참새를 보고 웃음을 머금고, 몸종이 나무라듯 그 허벅지를 꼬집는 장면이다. 해학적이면서도 여필종부를 강요하는 남존여비사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읽을 수 있다.

벚나무에 벗꽃이 막 피기 시작한 어느 봄날에 개 두 마리가 짝짓기를 하고 있군요. 왼쪽 담장 밑의 개구멍을 통해 들어온 녀석들인가 봅니다. 사람이 쳐다 보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주 열심히네요. 두 여인이 잘려진 소나무 밑둥에 걸터 앉아 구경하고 있습니다. 담벼락의 기왓장으로 보아 제법 있는 양반집의 아녀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채를 쓴 여인이 양반이고 그 옆에 허리를 끈으로 질끈 묶고 있는 댕기머리 계집아이는 마님을 모시는 종년이로군요.

가만히 보니 이 여인의 입성이 심상치 않습니다. 하얀 소복을 입은 것을 보니 상중인가봅니다. 상중이니 무척 슬프겠구나 생각이 들지만 여인의 얼굴을 보니 아주 요상스러운 미소를 띄고 있군요. 스캔들의 이미숙이 울고 갈 법 한 표정입니다. 그 옆의 종년은 이러한 마님이 못마땅한지 말은 못하고 얼굴이 벌개 진 채 옆눈질로 흘깃 거리며 치맛 자락만 당기고 있습니다.

이제 그림이 다 끝났나 싶었더니 이 이야기가 다 끝나도록 열심히 땀흘리고 있는 개의 윗 쪽으로 참새 세 마리가 보입니다. 마당에 앉은 두 마리의 참새를 보십시오, 그네들도 짝짓기로 바쁩니다. 홀로 남아 있는 참새는 외로운 듯 홀로 날고있으니, 과부가 따로 없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돈 많은 양반댁에 시집을 와 일찍 지아비를 여윈 여인네입니다. 하지만 과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절? 흥~! 웃기고 있네~! " (출처 : 소암조홍근)

-. 봄날의 과부






● 삼추가연(三秋佳緣) - 세명이 가을에 맺은 아름다운 인연

그림의 왼쪽에는 국화꽃이 피어 있고, 오른쪽에는 사내와 늙은 할미가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댕기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처녀가 있다. 사내는 아직 앳된 기운조차 느껴지는 젊은 나이고, 여자는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옆모습만 보아도 젊은 처녀임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웃통을 벗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남자는 옷을 벗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막 대님을 치는 것으로 보아, 바지도 벗었다가 이제 다시 주워 입는 것이다. 여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여자는 부끄러워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이미 하룻밤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곧 이 사내는 여자의 초야권을 샀던 것이다. 흔히 ‘머리 얹어준다.’는 말은, 기생의 초야권(初夜權)을 사서 땋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릴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이다. 동기(童妓)의 초야권을 사는 사람은 이부자리와 의복과 당일의 연회비를 담당해야만 했는데, 아마도 젊은 오입쟁이는 그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다. (찬솔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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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문화의 개방추세는 풍속화 뿐 아니라 각종 문학작품에도 다투어 등장하지요. 특히 1809년(순조 9년) 씌어진 애정소설 ‘절화기담(折花奇談)’은 혜원의 풍속화와 꼭 닮은 사회상을 그려냈습니다. ‘절화기담’은 이생이라는 선비가 우물가에서 순매라는 이웃집 여종에게 반해 요즘말로 ‘작업’을 하는 것이 기둥이 되는 줄거리입니다. 두 사람 말고도 남녀의 만남을 주선해 주는 역할을 하는 할머니인 노구(老)가 등장하지요. ‘혜원전신첩’에 실려 있는 ‘삼추가연(三秋佳緣)’에도 젊은 남자와 어린 소녀, 그리고 노구가 보입니다.

노구는 순매를 소개해 달라는 이생의 부탁을 일단 거절하고는, “순매는 마음이 고귀하니, 그 뜻을 앗을 수 없는 것이 첫번째 어려움”이라면서 “약간의 돈을 맡기시면 일을 주선해 보겠다.”고 속내를 드러내지요. 혜원은 ‘절화기담’의 삽화라도 그리듯 노구를 간교하고, 불길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왼쪽에 있는 젊은 선비는 저고리를 벗은 채 대님을 만지고 있는데,‘거사’를 위해 풀고 있는 장면인지, 일을 끝내고 묶고 있는 장면인지 미술사학도 사이에서는 내기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절화기담’에 힌트가 있는데, 이생과 순매가 운우지정을 나누는 장면을 ‘일진일퇴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니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분 바른 뺨은 달아올랐다.’고 묘사했습니다. ‘삼추가연’의 젊은 선비를 자세히 보면, 왼쪽의 뒷머리와 오른쪽에 보이는 귀밑머리가 온통 상투 밖으로 풀어헤쳐져 있지요. 혜원은 소녀의 자세에서도 정황을 알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습니다. 노구는 속물스러워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앉음새만큼은 그런대로 단정합니다. 반면 소녀는 긴장이 풀어질 대로 풀어진 탓인지 속치마를 드러내고 거의 퍼질러 앉아있다시피하고 있지요.

‘삼추가연’은 ‘깊어가는 가을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지만, 전체적으로 화폭에는 사랑의 기쁨이 아니라 성매매의 뒤끝에 남는 우울함이 배어 있습니다. 200년전 조선시대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조금씩...)








여속도첩(女俗圖堞)
신윤복의 풍속화 중에서 단연 백미는 앞서 소개된 30폭 퐁속화첩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크기로 종이에 채색된 것들이다. 
이에 필적할 만한 그림을 찾는다면 6폭으로된 편화(片畵)들을 들수 있다. 이 6폭은 모두 비단에 채색이 된것이다.



● '여속도첩' 중 연당의 여인(蓮塘의女人)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비단에 수묵담채, 29.6 x 24.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가작(佳作)이다.
연꽃이 활짝 피고 연잎이 다 자란 연못 너머로 별당의 툇마루에 걸터앉은 여인을 담고 있다. 장안에서 내노라하는 기방(妓房) 후원의 한장면으로 보인다. 한 손에 담뱃대, 다른 한 손에 생황을 들고 가랑이를 벌린 채 앉아있는 여인은 퇴기인 듯하다. 여름 한낮 무료함을 달래려 불던 생황을 내리고 인기척을 느낀듯 고개를 돌리고 있다.


도회적인 멋을 풍기는 기생의 옷매무시는. 혜원의 풍속화를 통해서 많이 보아 왔다. 사실 혜원만큼 시정(市井) 남녀간의 애정. 그 중에서도 특히 기생들의 사랑이나, 생태 묘사에 열정을 솓은 화가는 드물다. 이 <연당의 여인>은 연못가의 별당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한 손에는 장죽. 다른 한손에는 생황(笙篁)을 든채, 잠시 생각에 잠긴 여인을 그린 것이며. 칠흑 같은 트레머리 끝에 살짝 비낀 자주빛 댕기가. 연꽃 봉오리와 조화를 이루어 단조로운 화면의 색조에 산뜻한 액선트를 주고 있다. 치마 밑으로 드러난 흰속곳의 묘사는, 이 화가가 즐겨쓰는 선정적인 표현의 하나다.
(찬솔갤러리)




● '여속도첩' 중 처네 쓴 여인(처네 쓴 女人)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화첩 비단에 채색, 27.7 x 2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처네 쓴 여인은 혜원 풍속화의 일반적인 형태인 배경속에 주인공을 등장 시켰는데. 화면을 비스듬히 사선으로 양분하여 흙담이 있는 기와집과, 한길을 나타냈고 화면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렸다. 돌담너머의 기와집과 한길은 거의 같은 넓이를 화면에서 점하며. 여인과 오른쪽 하단에 적은 전몽적분약 맹추 혜원사 (?蒙赤奮若 孟秋 蕙園寫)의 2행에 걸친 간기와 관서(款署)는 같은 크기의 공간을 점하여 마치 인물에 짝하여 나타낸 듯한 화면구성에 있어 놀라운 배치를 발견케 한다.

어찌보면 다소 쓸쓸한 분위기로 보여지기도 하는데. 혜원은 다른 풍속화의 예에서 두 여인을 등장시켜 젊은 아낙은 얼굴을 앞으로 하여 젖무덤까지 짧은 저고리사이로 노출시켜서 건강미를 보이고, 노파는 측면으로 해서 주름진 얼굴을 애써 감춘 것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도 공통된 의도로 보여지기도 한다. 더욱이 계절이 음력 7월의 맹추이고 보면 아낙의 나이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묵서의 점몽(?蒙)은 천간(天干)의 옛날갑자(甲子)로서 乙의 이름이며. 적분약(赤奮若)은 육십갑자에 있는 축(丑)의 별명으로 乙丑年에 해당되는바 즉 1892년에 그린것으로 사료된다. 혜원의 그림에 나타난 간단한 묵서들은 달필로 암시하는 내용도 詩的이어서 비록 화원이기는 하지만 詩文에 대한 만만치않은 교양을 능히 짐작할 만하다. 관서에 이어 주문방인(主文方印) 과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다. (찬솔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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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뒷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얼굴 표정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차림새를 보니 여인입니다. 그림 제목에 드러나 있듯, 이 여인은 처네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런 답답한 의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여인들은 대부분 나들이할 때 이와 같이 머리에 뒤집어쓰는 '쓰개'를 하고 다녔지요. '처네'는 마치 치마와 같은 생김새인데, 주로 서민층 부녀자들이 사용하였습니다.

처네를 쓰고 다닌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추위를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명주에 솜을 두어 만든 이 처네를 머리 위에 두르고 안에서 손으로 여며 잡으면,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아 한결 따뜻하지요. 또 하나는 남녀를 구분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남성은 주로 바깥일을 하고, 여성은 주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은 함부로 바깥 출입을 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신분에 따라 다양한 쓰개를 뒤집어쓰고 다녀야 했지요.

그림 속 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사정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당연하지요. 옛 그림 중에는 글이 함께 있어 내용을 아는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이 그림에도 오른 쪽 아래에 한문 글씨가 있고, 끝에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그 내용은 '1805년 음력 7월 혜원 그림'입니다. 혜원은 신윤복의 호입니다. 언제 누가 그렸다는 글만 간단히 써 놓은 것이지요. 그러니 여인의 마음을 알아 내기는 어렵습니다.

이제는 그림의 배경을 찬찬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기와집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집의 흙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으니, 썰렁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는 이 여인의 마음을 대강 짐작하게 됩니다. 쓸쓸함이 바로 그것이지요. 화가는 이처럼 배경을 통해 은근히 등장 인물의 마음을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삼종지도'와 같은 유교적 규범에 얽매어 있었습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란 조선 시대 여성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였습니다. 즉 어려서는 아버지를,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했던 것을 말합니다. 특히 남편이 죽으면 재혼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여성을 '열녀'라고 떠받들었습니다. 이런 일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관습이었을 뿐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인들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소암 조홍근)




● '여속도첩' 중 전모 쓴 여인(氈帽 쓴 女人)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화첩 비단에 채색, 28.2 x 19.1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배경도 없는 단순한 화폭 위에 가늘고 뚜렷한 선묘로 그려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처네 쓴 여인> 과는 여러면에서 대조적이다. 전혀 배경이 없은 것이 그 첫째이며. 右顔八面으로 얼굴을 그렸는데 자신감 넘치는 자태로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두번째 차이 이다. 수줍음이나 부끄러움은 아랑곳 하지 않는 표정에. 오른손에는 쥘부채를 쥐고서 걷는 보폭도 넓다. 조선여인의 아름다움을 그 누구보다 잘 나타낸 혜원은 이 분야의 그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르고 가는 필선으로 여인을 그리되. 치마 저고리의 각기 부풀고 착 달라 붙은 모습이라든지. 모든 부분에서 몸체를 숨기는 고유복색이나, 이에 반해서 얼굴. 손끝. 발끝의 맵시가 사뭇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결코 외설스럽지 않은 묘사에 해학과 멋을 홍건히 담고 있다. 짤룩한 허리에 부푼치마. 그 아래 보이는 속곳바지와 외씨버선이 잠긴 좁은 신의 가는 선 등은. 혜원이 그린 여인도에서 쉽게 발견되는 공통된 묘사이다. 또한 나이 짐작이 다소 힘든 애띤 얼굴에 초생달 같은 눈썹과 순하게 생긴 둥근 얼굴과 코. 꼭다문 좁은 입 등 전혀 생소하지 않은 얼굴이다.

전모는 무늬가 없는 단순한 형태이나. 이와 대조적으로 전모끈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 그림에선 주인공 한사람만을 그렸으되. 화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 그루의 나무를 그렸으면 하는 위치에 전인미발가위기(前人未發可謂寄)란 제발을 의도적으로 적었다. 그 내용을 그림과 같이 견주어 살필 때 이해가 쉽지 않다. 이어서 혜원(蕙園)의 관서와 백문방인. 신윤복인 이 있다. (찬솔갤러리)

신윤복(1758년~ )의 그림 속에는 그가 살았던 18세기말에 유행했던 한복의 패션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그림으로 그리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형이나 왜곡은 일어났겠지만, 그의 그림은 한복을 가장 아름답게 그려냈다고 하겠다. 다르게 말한다면, 한복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미적 완성도를 그려냈다고 하겠다. ==> 자세한 사항은 여기로




● '여속도첩' 중 장옷 입은 여인
견본채색, 28.8 x 31.4 cm, 국립중앙박물미술관 소장 

배경이 전혀 없는 바탕 가운데에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어디론가 길을 가고 있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왼쪽의 아기 업은 맨발의 소녀는 장옷 입은 여인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례에 비해 작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앞서도 설명했듯이 옛날 고분벽화에서도 보이는 그림 그리는 방식을 혜원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림에서 이 소녀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림에서 소녀는 제 3자로서 장옷 입은 여인을 바라보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속도첩(女俗圖帖)》에서 보이는 그림들은 《혜원전신첩》에서 보이는 그림들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화가 자신이 그림의 내용과 그리는 방식에 변화를 주고 싶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다만 혜원은 여속, 즉 여인들의 습속이나 풍속 등 여인들을 그리고 있던 기존의 커다란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리는 방법을 달리하여 좀 더 원숙해 보이고 깊이가 있어 보이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왜 일까? 그도 나이가 먹는 것을 실감한 것일까? 《혜원전신첩》에서 보이는 가볍고 발랄한(?) 기법과 색감은 사라지고, 어느덧 색감도 묵직해지고 있음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 '여속도첩' 중 저잣길
견본채색, 28.2 x 19.1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저자'는 시장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입니다. 저잣길이란 시장이 늘어선 길을 뜻하지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신윤복은 조선 시대 풍속 화가로 유명합니다. 풍속화(風俗畵)란, 그 시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현실을 담은 그림을 말합니다.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당연히 사람들이 사는 다양한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야 합니다. 화가는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장 어귀를 돌아다녔습니다. 마침 생선을 가득 담은 함지박을 머리에 인 여인을 봤습니다. 화가는 싱싱한 생선에 눈길이 갔습니다. 보자기 밑으로 생선의 벌린 입과 꼬리가 잘 보입니다. 생선이 담긴 통은 붉은 함지박입니다. 오늘날의 고무통과 비슷하지만, 이것은 통나무의 속을 파서 큰 바가지 모양으로 만든 그릇이지요.

함지박 밑, 여인의 머리가 풍성해 보입니다. 당시 유행했던 맵시이지요. 여인의 얼굴을 보니 젊은 새댁입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가졌지요. 깨끗하고 단정한 목 아래 작고 귀여운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저고리가 짧으니 가슴이 반쯤은 드러나 보입니다. 저고리의 소매는 오늘날 한복에 비하면 폭이 좁은 편입니다. 오른팔에 끼고 있는 것은 망태기입니다. 채소 따위를 넣고 다닐 수 있게 만든 물건으로, 주로 식물의 줄기 따위로 만들었습니다. 밭에서 금방 뽑아 온 싱싱한 채소가 망태기에 담겨 있습니다. 속바지가 다 드러나게 끌어올려 질끈 허리끈을 동여 맨 치마가 인상적입니다. 신발을 보니 막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오른편으로 가던 길에, 누군가 말을 걸어 오자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젊은 여인에게 말을 건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튀어나온 광대뼈에 깊이 패인 볼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젊은 여인에 비하면 머리 숱도 없는 편이지요. 치마 저고리는 희고 누런 색으로, 수수합니다.

화가는 배경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사람들 뒤편에는 늘어선 가게와 흥정하는 사람들이 보였겠지요. 가게마다 색다른 물건을 가득 쌓아 놓고 손님을 부르는 소리가 왁자지껄했을 겁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아마 화가는 일부러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배경을 그리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배경을 그리지 않았으므로 유독 우리는 두 여인의 모습에 집중하게 됩니다. 대신 빈 공간에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들이 가득 차게 되겠지요. 우리가 오늘날 조선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이처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화가들의 뛰어난 관찰력 덕분입니다. (출처 : 소암조홍근)




● '여속도첩' 중 거문고 고르는 여인, 탄금(彈琴)
견본채색, 27.5 x 23 cm, 국립중앙박물미술관 소장  

두 여인과 한 소녀가 악기 하나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머리 맵시가 풍성한 여인들은 지금 악기의 줄을 고르고 있지요. 그 곁에서 소녀는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하게 앉아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줄의 개수로 보아 이 악기는 거문고입니다. 삼국 시대 이후로 우리 조상들이 즐겨 다뤄 온 대표적인 현악기이지요. 그림 속의 여인들은 지금 명주실로 만든 줄을 매만지고 있습니다. 제각기 굵기가 다른 이 줄들은 가장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상태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음의 기준을 잡을 수 있지요.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이 거문고라는 악기를 늘 가까이 하였습니다. 사랑방에는 책과 더불어 항상 거문고가 놓여 있었지요. 선비들이 늘 거문고를 끼고 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이 악기의 소리가 당연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이렇듯 좋은 소리는 아무나 쉽게 낼 수 없기 때문에 늘 손에 익숙하도록 연습을 해야만 했답니다. 선비들은 거문고가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은 마치 사람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줄을 고르는 것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출처 : 소암 조홍근)








사시장춘(四時長春)
● 전(傳)신윤복 18세기. 지본담채. 27.2 x 15.0  국립중앙박물관 

왼쪽 위에 ‘혜원’ 이라는 낙관이 찍혀있는데 왜 혜원 신윤복의 그림으로 추정하냐면 무엇인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혜원’ 이라는 낙관이 후대사람이 찍은 ‘후낙’ 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을 전문가들은 ‘전칭작’ 이라고 부릅니다. ‘전칭작’이란 그 사람이 그렸다고 전하는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사시장춘>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1) 사철의 어느 때나 늘 봄과 같음. (2) '늘 잘 지냄'의 비유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시장춘>은 봄그림 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봄 그림은 아닙니다. 봄을 빙자한 노골적인 춘화(春畵)도 입니다.

어느 주막 후원쯤으로 짐작되는 공간에서 댓돌도 아니고 쪽마루에 가냘픈 여자 신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옆으로 남자 신이 놓여있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가지런히 벋어놓지 못한 채 신발 한 짝은 비딱하게 벗겨져 있습니다. 마루 높이가 제법 높아 보여 긴치마를 입은 여자 혼자 오르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남자가 먼저 마루에 올라 여자를 부축하여 위로 끌어올려 방안으로 들인 후 급한 마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을 새도 없이 문을 닫아버렸을 것입니다. 남자의 마음은 흑심이라 했던가? 남자 신은 검은색으로 부끄러운 듯 여자 신은 달아오른 도화 빛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신발을 아래 댓돌도 아니고 쪽마루 위에 올려 논 이유가 무얼까요? 무언가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만남은 아닐 것 같은 상상을 보여주는 장치 아닐까요? 

부부가 아닌 남녀가 만난 방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증이 더해가는데 오른쪽 후경을 보니 가는 실낱같이 흐르는 계곡이 굽이굽이 흘러 폭포를 이루고 있는데 주변은 거무틱틱하니 바보가 아닌 이상 여체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술병을 들고 서있는 계집종입니다. 아마 술을 가지고 오라는 어른의 명을 받아 조그마한 손으로 술병을 들고 문 앞에 서니 야릇한 소리가 들리고 문을 통해 전해지는 훅근한 열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겠지요. 아직 남녀간의 춘정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계집종으로서는 난감한 순간 이였겠지요. 그렇게 참으로 곤혹스런 순간을 화가는 앞으로 내민 손과 뒤로 엉거주춤 뺀 엉덩이의 대조를 통해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곤혹스런 얼굴을 그리는 것 보다 연분홍의 댕기가 안쓰러워 보이면서 옆 얼굴에 홍조를 살짝 보여주는 것으로 화가의 마음보다 붓이 앞서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춘화도의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이쯤 되면 어떤 분위기를 그린 것인지 그림은 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는 아직 할 말이 남았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주련에 ‘사시장춘’ 이라고 떡 하니 적어놓았습니다. 남녀간의 춘정은 나날이 봄날이다. 하하하 정말 조선시대 춘화도의 으뜸으로 꼽히는 그림답지 않습니까? 남녀의 벗은 몸도 얼굴 한 조각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춘화도의 핵심인 관음의 욕망을 전부 보여주면서 ‘나날이 봄날’ 이라니..

‘사시장춘’이 남녀간의 운우지정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꽤 유명했나 봅니다. 이 그림을 염두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각설이 타령의 한 구절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님아, 칠야삼경 깊은 밤에  가죽방아 찧을 적에
꿍덕 꿍덕 떡방아만 찧지마라, 방아 처음 내던 사람 알고 찧나 모르고 찧나

강태공의 낚시방아처럼, 사시장춘(四時長春) 걸어 두고 떨구덩 떨구덩 찧어주소
얼시구 시구 디딜방아 들어간다 절시구 시구 들어간다. 전진은 천천히 후퇴는 재빨리 약입강출 들어간다


(출처 : 소암조홍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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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에서는 달을 그리지 않는다? 수묵으로 색의 농담을 조절하는 까닭에, 서양화에서처럼 달을 '직접' 그릴 수 없다. 게다가 달은 흰색이다. 수묵으로 흰 달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달에 해당하는 공간만 남겨둔 채, 나머지 부분에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내면 된다. 간접적이다. 그러니까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주변의 것을 통해 감춰진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홍운탁월법(烘雲託月法)'이라고 한다. '사시장춘'은 에로틱한 춘정을 홍운탁월법으로 구현한 빼어난 춘화도다. 따라서 남녀의 모습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즉,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구름'만 치밀하게 그려두었다. 그럼에도 에로틱한 '달'은 감상자의 마음에 둥실 뜬다. 노골적인 표현 하나 없이 에로티시즘의 진수를 보여준다.

멀리 계곡과 폭포가 있는 어느 산기슭. '모텔' 같은 집에 술 쟁반을 받쳐 든 계집종이 엉거주춤 서 있다. 쪽마루에는 두 켤레의 신발이 놓였고, 기둥 뒤에는 봄날을 암시하듯 꽃이 활짝 피었다. 이것이 내용의 전부일까? 아니다. 그림의 속내는 '숨은 그림'처럼 감추어져 있다. 단순히 이상향이나 봄이 정취를 그린 산수화가 아니다. 봄을 빙자한 노골적인 춘화다. 오른쪽 상단의 계곡은 좁고 깊다. 그 위쪽이 약간 검은 색을 띤다. 숲 같다. 계곡과 숲, 무슨 의미일까? 여자의 성기다. 그러고 보면 왼쪽에 방문을 살짝 가린 나뭇가지의 폼이 수상하다. 잎이 장비의 수염처럼 빽빽하고 거칠다. 바로 남자의 음모다. 절묘하게도 계곡을 향해 뻗어 있다. 비교적 겉으로 드러난 에로틱한 장치들이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신발의 배역을 아주 뜨겁게 만든다... (더 자세한 글은 [혜원 신윤복] 풍속화 - 허접거사)

-. '사시장춘'의 신발(소암 조홍근)




봄날 밤나들이






아기업은 여인
● 지본담채, 23.3 x 24.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떤 아주머니가 옥동자를 업고, 가슴은 내어놓고 있다. 가슴을 내어놓는 건 조선말기 19~20세기 초까지 흔하게 보이던 풍경으로 아들을 낳은 여성만이 내어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아들을 낳았다는 자랑의 증표라고나 할까. (學古山房)


신윤복의 작품으로 구도가 왼쪽에 잡혀있는 작품으로서 오른편에 길다란 제시가 붙어있다. 이 그림에 '蕙園申可權字德如'라는 기록이 있다. 그림의 색채가 다소 변색되어 여인과 아기의 얼굴이 검게 보이지만 원래는 깨끗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여인의 키는 훤칠하고 팔등신에 가까우며 풍성한 가채머리를 한 것으로 보아 신분은 기녀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에 유행하였던 짧고 꼭 끼는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을 노출하여 매우 에로틱하나 등에 업은 아기로 인하여 모성애의 느낌도 함께 강하게 풍긴다. 그러나 여인의 복색이나 얼굴이 주는 느낌은 여전히 여색女色을 표현하고자 의도를 보여준다. (소암 조홍근)




서생과 아가씨

아리따운 아가씨가 서생을 찾아와 말을 붙이지 못하고 기둥에 기대어 서 있다. 서생은 단정히 앉아 시선을 한 곳에 모으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감님과 아가씨

아가씨의 인기척에 영감님이 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수화

김홍도 이후 한국 화원가에 등장한 특징은, 구도를 중시하여 세련된 화면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신윤복이 전하는 산수화도 그러한 경향을 보인다. 구도는 여백을 많이 두어 깔끔하고, 붓질 또한 손을 최대한 적게 하여 화면은 깔끔하기 그지없다. 
신윤복의 회화를 여성스럽다고 보는데에는 이러한 경향이 한 몫한다. (學古山房)




거범도강
● 지본담채 / 27.4 x 32.7 cm  간송미술관 소장

넓은 강으로 가득 찬 화면을 하단은 여백으로 남겨두고 상단에만 미점의 산과 배를 포치시키고 있어 시원한 맛이 그대로 전달되는 작품이다. 

쌍돛을 단 배에는 네 명의 인물이 타고 있는데 미점준으로 처리한 산은 겸재 정선의 작품과 닮아있는데 아마도 중국화보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작품 역시 담색의 시원스런 화면으로 인해 마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일품이다. (허접거사)







송정관폭도
● 지본담채 / 59.4 x 47.7 cm  간송미술관 소장.

소나무가 있는 정자를 주제로 삼고 있는 그림이다. 폭포를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도 <계명곡암>이나 <송정아회>에서 등장하는 인물과 닮아 있어 노년기의 혜원이 거처하던 곳이 아닌가 싶다. 절벽에 사용된 기법은 <계명곡암>과 같고 나무의 표현은 아주 작은 태점으로 찍어서 나타내는 것이 <송정아회>에서 보이는 필법과는 아주 다른데 커다란 윤곽을 나타내기 위해서 바탕에 길게 그은 선을 옅은 색으로 처리한 것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산수화의 일부 작품에서 보이는 아주 세밀하고 섬세한 필선은 풍속화의 배경에 등장하는 필법과도 공통점이 있다. 

정자에는 노인들이 한담을 나누는지 둘러앉아 있고 뒷짐지고 서있는 노인은 관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폭포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한 여름 속세에 묻힌 초인의 심사를 느끼게 한다. 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접거사)

성품이 궁벽하니 거처가 도리어 고요하고 (性避居還精)
사람이 드무니 더위가 침범하지 않는다. (人間暑不浸)





계명곡암도
● 지본담채 / 59.4 x 47.7 cm  간송미술관 소장.

위의 송정관폭도와 짝을 이루는 그림으로, 역시 같은 필치를 보여준다. 은은한 숲에 초옥이 있고, 나무들의 잎새는 초여름으로 보인다. 산안개가 낀 가운데, 집주인으로 보이는 선비가 물가에 앉아 있다. 신윤복의 독특한 붓질이 상당히 독특한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바위나 토파의 그늘진 부분은 짙은 먹색으로 강렬하게 표현하고 나머지 부분은 엷은 먹색이나 바탕색으로 처리함으로서 전체적으로 맑은 느낌이 흐르는 그림이다. 부드럽게 처리된 잔가지에 나뭇잎이 돋고잇는 것이 이른 봄의 계곡 풍경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우측 언덕에는 한 노인이 앉아 앞에 있는 정자를 바라보고 있다. 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접거사)

시냇물 소리쳐 흐르니 바람은 물위를 스치고 (溪鳴風薄水)
골짜기 어두워지자 비는 산으로 이어진다. (谷暗雨連山)





귀로산수도(歸路山水圖)
● 지본수묵담채, 25.2 x 15.5cm, 호암미술관 소장.

우점을 많이 찍어 전반적으로 점잖아 보이는 그림이다. 
기와집에는 역시 누군가 앉아있고, 손으로 보이는 노인이 지팡이를 끌고 시동을 이끌고 향하고 있다. 현재 심사정의 영향이 느껴진다.





소상야우도
● 지본수묵담채 / 87 x 52.5 cm  개인 소장.

소상팔경 중 하나인 소상야우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한밤중 비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전면에 배치하였고, 앞뒤로 안개가 자욱하다. 

개인 소장되어있는 소상팔경 8폭 그림 가운데 한폭으로 같은 주제를 그린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의 그림이 남아있다. 소재자체는 겸재 정선을 잇고 있으나, 필법은 신윤복 특유의 필법으로 개성화되어있다.





송정아회도(松亭雅會)
● 종이에 담채, 38*32.5cm, 간송미술관 소장.

필치가 다소 거칠어져, 남성적인 회화적 매력을 보여준다. 노인이 지팡이를 끌며 정자로 걸어가고 정자에는 누군가 기대앉아 있다. 길 가로 연지가 있고, 연잎이 만발해있다. 소나무와 바위산의 표현이 매우 흥취있다. 


혜원은 지나친 여속도(女俗圖)를 그린다 해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여속도 전문가여서, 그가 남긴 산수화는 많지 않으나 송정아회는 산수화 중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부드러운 담묵 필선으로 그려 올라간 소나무들은 수려하기가 마치 여속도 속의 늘씬한 미인을 보는 듯하고 죽림 뒤로 자리잡은 초당 속에 반쯤 걷어 붙인 휘장 뒤로 비스듬히 상반신을 드러낸 인물이나 초당을 찾아오는 긴 지팡이의 인물도 모두 훤칠한 키에 구성진 몸매로 미끈미끈하게 그려져 있다. 

솔숲과 대숲에 싸인 초당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데, 비교적 강렬한 붓질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뛰어난 기교를 보이고 있다. 특히 화면 전체를 담청으로 훈염하다시피 한뒤, 이와 큰 차이 없는 담담한 색조를 구사하는 듯 하다가,  소나무 밑에서는 초묵(蕉墨)에 가까운 음영을 드리워 단조로움을 깨뜨려버리는 대담한 솜씨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수하시옥도
● 수하시옥도. 지본담채, 26 x 15.6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단원 김홍도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낙관만 없다면 단원의 작품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신윤복이 어느 정도로 단원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느냐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신윤복이 김홍도의 그림을 바탕으로 그림 연습을 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필법은 김홍도의 회화의 요체를 잘 이해한듯, 김홍도 회화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또한 모작에서는 보기 힘든, 흥취가득한 붓질을 보여준다. 소품이지만 상당히 괜찮은 그림이다.






영모화




묘견도(猫犬圖)
● 18세기 중엽~19세기초, 비단에 담채 31.8*16.3cm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화폭 중앙 왼쪽에 커다란 괴석(怪石)이 비수(脾瘦)가 심하고 빠른 붓놀림으로 묘사됐는데 묘선의 흐름이 거친 바탕의 효과와 함께 생동한다.

바위 위에 한 마리의 고양이가 잔뜩 웅크리고 아래에서 꼬리를 흔들며 올려다보는 개를 주시하고 있다. 이 바위 뒤편에서 담묵으로 친 석류나무 오른편을 향해 뻗어 있는데 석류 세 개가 탐스럽게 달려 있다. 그림 전경 오른쪽으로도 괴석의 일부가 보이고 있어, 여기서부터는 개, 바위의 뒤틀리면서 움직이는 방향 ,그리고 그 위의 고양이로 이어지는 대각선 구도를 석류가 깨뜨려 준다. 

개나 고양이, 특히 개의 잔털 묘사가 잦은 세필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통적 영모도와는 달리 식물이나 석질의 묘선과 크게 대치되지 않고 어울림은 이 그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소암 조홍근)







나월불폐도
● 견본수묵 / 25.3 x 16 cm  간송미술관 소장.







● 지본채색, 23 x 23.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나무와 매
● 지본수묵, 북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신윤복의 그림으로 전하는 그림 중에, 이례적인 그림으로, 신윤복은 사인풍의 이러한 수묵화도 그렸다. 채색을 넣지 않은 굵은 붓질로, 거칠게 그려낸 작품으로 사인적인 기풍이 있으면서도, 신윤복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첨가되어있다. 화면의 가운데를 늙은 소나무가 관통하고 있고, 매 한마리가 무엇을 본듯 내려앉고 있다. 그 아래로 달이 은은하게 마무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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