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60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 화첩이다.
1첩(帖)당 12폭씩 묶어 5첩(帖)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동나무판을 겉표지로 삼고 있다.
겉표지에 「금강전도(金剛全圖)」라는 표제가 묵서(墨書)되어 있을 뿐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제화시(題畵詩)등은 일체 없고 각 폭 그림마다 해당 진경(眞景)의 명칭이 역시 묵서(墨書)되어 있는데 단원 글씨는 아니다.
그림 제목이 되는 이 명칭 곁에 ‘檀園’ ‘弘道’라는 두 방의 방형백문(方形白文) 인장이 폭마다 찍혀 있으나 이 조악(粗惡)한 인장은 후낙관(後落款)으로 이 그림을 손상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 화첩은 본래 70폭이었다 하는데 근년에 10폭이 흩어지고 60폭만이 다시 5첩(帖)으로 꾸며진 모양이다.
흩어진 10폭은 다음과 같다.
1. 청허루(淸虛樓), 2. 천연정(天然亭), 3. 영랑호(永郞湖), 4. 단발령(斷髮嶺), 5. 정양사(정양사),
6. 만폭동(萬瀑洞), 7. 신계사(神溪寺), 8. 옥류동(玉流洞), 9. 외선담(外船潭), 10.유점사(楡岾寺)
본래 이 화첩은 단원이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관동지방의 해산승경(海山勝景)을 사생해 온 ‘봉명도사첩(奉命圖寫帖)’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니던 화첩인데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서영명위장해산화권(書永明尉藏海山畵券」(『淵泉集』 권20)과 「제단원해산첩(題檀園海山帖)」, 칠십수 선이십삼(七十首選二十三)(『淵泉集』 권4) 및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제해산첩후(題海山帖後)」(『표롱을참(??乙懺)』 권5) 등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화첩이 정조대왕의 유일한 부마도위(駙馬都尉)이던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 1793~1865) 구장(舊欌)의 그 정조 어람본(御覽本) <해산첩(海山帖)>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연천과 항해는 영명위의 백중씨(伯仲氏)들로 이들이 남긴 윗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 정조가 단원에게 관동의 해산(海山) 승경을 그려 오게 하자 단원은 왕명을 받들어 70폭 그림을 그려 바치게 되고 정조는 이를 5권의 화첩으로 만들어 왕실 내부(內府)에 비장한다.
그 뒤 순조 9년(1809)에 순조가 이 화첩을 매제인 영명위에게 하사하게 되고, 영명위는 3년 뒤인 순조 12년(1812)에 백씨인 연천에게 부탁하여 그 서문을 짓게 하였으며, 다시 9년 뒤인 순조 21년(1821)에는 연천이 매 폭마다 제화시를 지으니 70수에 이르렀었다.
이 글들을 화첩 속에 미처 써넣지 않고 있다가 다시 8년 뒤인 순조 29년(1829)에 영명위는 중씨인 항해에게 부탁하여 이를 정서하여 화첩에 넣게 하고 그 전말을 밝히는 후기(後記)를 붙이도록 한다.
이런 내력을 가진 화첩이라면 응당 연천 형제들의 서문이나 발문은 물론 연천의 70수 제화시가 이 화첩에 합장(合裝)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금강전도>첩은 이런것들이 하나도 합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화첩이 곧 영명위 구장첩이자 정조 어람첩이라고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10폭의 그림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이런 글씨들이 분리될 수도 있겠지만 구태여 분리시켜 영명위 구장이거나 정조 어람본이라는 증거를 인멸할 이유가 없으니 이 역시 설득력 있는 추측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금강전도>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원 특유의 산수기법을 도처에서 확인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진경산수화첩을 일단《해산첩(海山帖)》의 원형으로 보고 다른 문제들은 장차의 연구에 맡기기로 하겠다.
단원의 스승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豹菴遺稿』, 권4)에 의하면, 이 <해산첩>은 정조 12년(1788) 무신(戊申) 가을에 단원이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관동 9군(郡)을 편답하면서 그려낸 것이라 한다.
이때 76세의 표암이 44세의 단원을 그 큰자제인 강인이 부사로 와 있는 희양에서 만나 9월 13일부터 17일까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사생하였다고 한다.
현재 5첩으로 꾸며진 이 <금강전도>는 10폭이 흩어질 때 장첩(裝帖)도 일부 교란된 듯 편답 순서가 곳곳에서 뒤바뀌어 있다. 연천이 읊었다는 제화시는 23수만 『연천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남은 시들을 찾아내는 일이 또 하나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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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금강산 여행
김홍도는 44세 때인 1788년 가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 여행하게 되었다.
이때 정조대왕은 김홍도와 함게 동료이자 선배화원인 김응환도 동행할 것을 명하고, 두 사람이 거쳐가는 지방의 수령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부족함이 없이 준비해 주라고 특별히 지시하였다.
정조가 이처럼 김홍도에게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그려오라고 지시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정조 자신도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무척이나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승지로서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멀리 중국인까지도 그 명성을 듣고 가보고 싶어했으니 만큼 인간 정조로서도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國政에 힘써야 하는 군왕으로서 최소 한달은 걸리는 금강산 유람을 다녀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림으로나마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적합한 화가는 자신이 왕세손(王世孫) 시절부터 신임하고 아꼈던 김홍도가 적임이었다.
그런데 김홍도가 다녀온 금강산과 관동팔경 사생 여행의 경로는 요새 남한 사람들이 즐겨 가는 금강산 유람을 가던 코스와도 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바닷길로 해금강, 외금강을 볼 뿐이고, 옛날의 금강산 유람도 한양에서 철원, 회양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을 주로 보는 코스였다.
그런데 김홍도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영동고속도로와 동해안 해안도로, 그리고 금강산에 이르는 코스를 잡았다. 이것은 김홍도의 여행 목적이 단순히 금강산 뿐만이 아니라 관동팔경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관동팔경의 명승지를 얼마나 가보고 싶어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금강산은 관동팔경과 함께 바다와 산(海山)승경의 중심이었지만, 오직 금강산만이 볼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홍도가 지나간 지역 중에는 남한의 대표적 명산, 설악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김홍도가 지나간 여로를 순서대로 열거해 보기로 한다.
한양을 떠나 양근, 지평(楊根, 砥平: 현재의 양평군)을 거쳐 원주에 이르러 淸虛樓를 그렸다. 청허루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원주목 조에 "추천현 객관 서쪽에 있는데 절벽과 맑은 담이 있다(在酒泉懸客官西 石壁削立 下有澄潭)"이라 되어 있다.
원주를 떠나 평창군 방림(芳林), 대화(大和)를 거쳐 淸心臺를 그렸다. 청심대는 대화에서 진부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며, 진부에서 정선으로 가는 405호 지방도로변에 있다. 현재는 영동 고속도로나 서울->강릉간 국도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강릉으로 가는 大路였다.
청심대를 지나면 진부를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간다. 월정사, 사고(史庫), 상원, 중대를 그리고 다시 큰길로 나와 횡계를 거쳐 대관령을 넘었다. 대관령 고개마루에서 좀 내려와 멀리 강릉을 조감하며 대관령을 그렸다.
강릉에서는 천연정, 구산서원, 경포대, 호해정을 그리고 난 후 남쪽 삼척으로 갔다.
삼척에서는 죽서루와 능파대, 두타산 소금강 무릉계와 용추폭포를 그렸다. 능파대는 현재는 추암, 촛대바위로 불리고 있다.
이어 계속 남쪽으로 울진 성류굴, 망양정, 평해 월송정을 그렸는데 이곳이 남쪽 끝이다.
다음부터는 다시 북상하여 강릉을 지나 양양으로 갔다. 낙산사, 관음굴을 그리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토왕폭, 계조굴(울산바위), 와선대, 비선대 등을 그렸다.
속초를 지나 간성(고성군 토성면)의 청간정을 그렸다(현재의 청간정은 위치가 달라짐). 더 북상하여 감호와 영랑호를 그렸는데 후자는 속초의 것과 이름이 같으니 위치가 다르다. 감호는 현재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에서 구선봉(九仙峰) 아래 위치해 있다.
고성에서는 대호정, 해산정, 해금강, 삼일포를 그렸다.
이어 북상하여 통천 초입의 옹천을 그리고, 문암, 금란굴, 총석정, 환선정을 그렸다.
또 북상하여 흡곡에 이르러 안변호반에 있는 시중대를 그렸다.
다음 안변 가학정을 그렸는데 이곳이 김홍도의 여행 중 가장 북쪽 끝이다.
남하하여 철령을 넘어 회양에서 취병암과 맥판을 그렸다.(회양에서 강세황과 만남).
며칠 후 강세황 일행과 함께 내금강으로 들어가 장안사와 내금강 일대를 그렸는데, 노쇠한 강세황은 먼저 회양으로 돌아갔다.
김홍도 일행은 내금강에서 우선 명경대 골짜기를 그렸다.(명경대, 문탑, 백탑, 증명탑, 영원암).
다음 명연, 삼불암, 백화암 부도, 표훈사를 그리고 정양사로 올라가 헐성루에서 금강산을 조망한 모습을 그렸다.
다음 원통암 골짜기로 가서 원통암, 수미탑을 그리고 다시 내려와, 만폭동 골짜기를 그려 나갔다. (흑룡담망보덕암, 분설담, 진주담, 마하연, 묘길상 등).
내금강을 다 그린 후에는 외무재령을 넘어 동해안쪽 외금강으로 갔다. 유점사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은선대에서 십이폭포를 바라 보고 그렸다. 효운동과 선담, 유점사를 그렸다.
이어 외금강 유점사 계곡 문호인 백천교를 건너 고성쪽으로 나왔다가 발연과 그 위의 치폭도 그렸다.
다음 신계사 계곡으로 들어가 신계사, 옥류동, 비봉폭, 구룡연 등을 그렸다.
다시 나와 온정을 거쳐 만물초를 그리고 온정령을 넘어 회양으로 가서 강세황에게 그림들을 보여 주었다.
회양으로 가기 전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과 작별하고 내려오면서 맥판을 그렸을 것이다. 단발령과 맥판은 회양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렸을 수도 있다.
한양으로의 귀로에 금성 피금정을 그리고, 금화, 영평을 거쳐 돌아왔다.
▣ 김홍도가 그려온 금강산 그림
김홍도는 금강산 일대의 사생 여행을 통하여 약 100 여점의 초본을 그려왔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약 10미터 달하는 채색 금강산도 횡권(橫卷)을 제작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는 이에 여가가 나면 이 금강산도를 수시로 펼치며 감상하였고, 궁중의 신하들에게 금강산도를 주제로 하여 시를 짓도록 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덕무, 서유구 ·서유본 형제 등의 문집에 금강산도 長詩나 이와 관련한 글들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금강산도권은 그 후 궁중의 화재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궁중에는 이 금강산도 횡권 이외에 김홍도가 그려 바친 화첩 본 금강산도(5권 70폭)도 전해졌다.
그러다가 순조에 의해 1809년 정조의 부마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 1793~1865 이후)에게 하사되어 그 아들 홍우철(洪祐喆, 경기감사)대까지 전해졌으나 그 이후의 행방은 묘연하다.
현재까지 전하는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개인소장 <을묘년화첩> 중의 <총석정>, 호암미술관 소장 <병진년화첩(檀園折世寶)> 중 <영랑호>,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산도8첩병풍>, 개인소장의 <명경대>, <만폭동> 등 여러 점이 있다.
그리고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60폭과 40폭으로 이루어진 금강산화첩도 있다.
이 중 60폭으로 이루어진 화첩은 화풍이나 세부묘사, 기타 다른 작품과의 비교 등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 볼때 김홍도가 그려온 금강산화첩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후대의 뛰어난 모사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이 60폭 화첩의 내용 중 일부를 통해 김홍도가 금강산 여행을 통해 그려 나갔던 현장들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 보는 한편, 실제 경치를 어떻게 회화로 작품화 하였는지도 알아보기로 한다.
- 전 김홍도 필 60폭 금강산화첩의 내용 -
한편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유명하여 많은 화가들이 그의 작품을 모델로 삼아 모방하였다.
이런 작품은 무수히 많으나 대표적인 것으로 문인화가 이의성(1775~1833)이 그린 <해산첩> 20폭, 조선말기의 문신 이풍익(1804~1887)이 그리게 한 <동유첩(東遊帖)> 28폭, 필자미상 <금강와유첩(金剛臥遊帖)> 30폭 등이있다.
끝으로 김홍도의 금강산도의 화풍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前代 정선이나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훨씬 객관적, 사실적이며, 묘사태도도 더욱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둘째,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서양화법의 원근법, 투시도법을 활용하여 넓고 합리적인 공간표현을 보여준다.
셋째, 김홍도는 객관적, 사실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회화적 목적을 위해서는 과감한 생략과 압축을 가했다.
이밖에도 김홍도는 전통적인 지도나 궁중행사도의 기법인 부감법도 활용하고, 금강산의 다양한 경관을 묘사하기 위하여 다양한 기법을 동원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김홍도가 금강산도에서 이룩한 객관적 사실성과 높은 예술성은 조선시대 금강산도의 정점(頂点)이자 우리나라 진경산수화의 대표적 성과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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