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관련 자료들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 김홍도의 금강산 여행과 금강사군첩 ■ 김홍도의 풍속화와 배경 ■ 김홍도의 춘화도 - 운우도첩(雲雨圖帖) ■ 도화서와 화원 ■ |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 |
단원 김홍도의 작품세계 * 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은 현재 200여 점 정도 알려져 있는데 화풍상의 변화는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에는 전기에는 원체화적(院體畵的) 경향을 띤 정형산수를 많이 그렸는데, 1778년 작인 〈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6폭병풍과 선면화(扇面畵) 등에 잘 나타난다. 50세 이후의 후기에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檀園法)이라 불리는 보다 개성이 강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의 후기 산수화풍은 석법(石法)과 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발견되지만 고도의 회화감각으로 처리된 탁월한 공간구성과 변형된 하엽준(荷葉),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먹선의 강조와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 등을 통해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또한 그는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화조 등을 그려넣어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다. 도석인물은 전기에는 주로 신선도를 많이 그렸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주름과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소방하면서 농익은 필치로 바뀌게 된다. 김홍도의 회화사적 비중을 한결 높여주고 있는 분야는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광경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있는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했던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나란히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당시 속화체(俗畵體)로도 불렸던 그의 풍속화풍은 현실적인 소재를 소박한 생활정서와 풍류적 감성이 가미된 생동감 넘치는 기법으로 창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평가 및 영향> 홍백화(洪白華)의 글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활달해서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한다.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김홍도가 이룩했던 한국적 감각의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화 발전에 탁월한 발자취를 남겼다. 안견(安堅)·정선·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켜 김홍도파 또는 단원파(檀園波)라 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과 개인소장의 〈단원도 1784〉·〈금강사군첩〉·〈섭우도 涉牛圖〉·〈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圖 1804〉 간송미술관 소장의 〈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단원화첩〉(1796년작, 보물 제782호) 등이 있다. | |
연보로 본 김홍도의 생애 김홍도의 금강산 여행과 그림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우선 김홍도의 생애를 연보를 통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이 그의 전체에서 차지하는 연대기적인 위치와 문화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회화 자체의 이해에도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 김홍도 年譜 - *1774년 강세황이 서울에서 안산시 부곡동 처가 근처로 이사옴 1745(영조21)년 金海 金氏 중인 집안에서 출생, 증조부는 萬戶(종4품). 부친 金錫武는 벼슬없음 소년기 - 10대 : 安山에서 유명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과 문학가 이용휴(李用休)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서 문예 전반의 교양을 쌓음. 10대말 - 20초 : 도화서 화원이 됨. 20대부터 명성 날림. 1765(영조41)년 (21세) : 《景賢堂受爵圖?屛》을 그림(그림은 전하지 않음). 1773(영조49)년 (29세) : 英祖御眞 및 世孫(正祖)의 초상을 그리는데 동참화사 1776(영조52)년 (32세) : 봄 호암미술관 소장 《群仙圖》8첩병풍 ※ 3월 5일 英祖 승하, 正祖 즉위. 1778(정조 2)년 (34세) : 《行旅風俗圖》 8첩병풍, <西園雅集圖>扇面,<西園雅集圖>6첩병풍 1779(정조 3)년 (35세) : 《神仙圖》 8첩병풍(국립박물관), <松月圖> 1781(정조 5)년 (37세) : * 眞率會. <仕女圖>, <正祖御眞>(31세상), 《慕堂平生圖》8첩병풍 1782(정조 6)년 (38세) : <南極星圖> 1783(정조 7)년 (39세) : 12월 28일 경상도 安奇察訪 임명(이후 1786년 5월까지 2년4개월간 재임). 1784(정조 8)년 (40세) : 燈淸閣雅集. 淸凉山 遊覽 <檀園圖> 1786(정조10)년 (42세) : "湛樂薺"懸板(안동인근 풍산읍 상리동 宣城李氏 ?華亭) 5월 경상감사 김상철과 이병모의 선정비 세움(현재 안동시립민속박물관 뜰). 5월 안기찰방 임기를 마치고 강세황에게「檀園記」를 청해 받음 <安陵新迎圖>(原本은 전하지 않음). 1787(정조11)년 (43세) : 李漢鎭과 <寧靜帖>을 합작 1788(정조12)년 (44세) : <金泥竹鶴圖>선면, <金泥花鳥圖>>선면. 隱巖雅集, 4월2일 李德懋의 부친의 71세 생일잔치에참석, 가을 金剛山 寫景. 1789(정조13)년 (45세) : 對馬島에 가서 지도를 그림. ※ 顯隆園 영건. 1790(정조14)년 (46세) : ※龍珠寺 창건, <騎驢遠遊圖>선면, 《十老圖象帖》 (강세황과 합작) 1791(정조15)년 (47세) : ※강세황 卒(79세), <松石園詩社夜宴圖>, <정조어진>, 12월 22일 충청도 延豊縣監 임명. 1792(정조16)년 (48세) : 연초 연풍현감 부임. 公靜山 上菴寺에 기우제와 시주. 이때쯤 아들 金良驥 출생. 9월 李光燮, 李漢鎭, 黃運祚 등과 西原雅集. 1793(정조17)년 (49세) : 연풍현감 재임. ※봄 작년에 이어 三南에 가뭄과 기근. 1794(정조18)년 (50세) : 연풍현감 재임. ※3년 연이어 三南에 큰 기근. 1795(정조19)년 (51세) : ※1월 7일 연풍현감 해임. ※윤2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華城). 『園幸乙卯整理儀軌』圖設 삽화, 《을묘년화첩》, 《풍속도8첩병풍》 1796(정조20)년 (52세) : 《병진년화첩》(檀園折世帖), 『佛設大報父母恩重經』再刊. <徐直修肖像>, 《園幸乙卯整理所?屛》(수원능행도). ※8월 19일 華城 완공, 水原行宮에 排設한 병풍 ?本華城秋八景圖 그림. 1797(정조21)년 (53세) : 『五倫行實圖』 1798(정조22)년 (54세) : <海山仙鶴圖> 1799(정조23)년 (55세) : ※ 이 무렵부터 만년에 쓴 書簡과 詩文이 《檀園遺墨》 1800(정조24)년 (56세) : 正初 歲畵 《朱夫子詩意圖>, 8첩병풍 ※6월 28일 正祖 갑자기 승하함. 1801(순조 1)년 (57세) : 《三公不換圖?屛》 1802(순조 2)년 (58세) : <滄波圖>선면, <老僧觀瀾圖>, <歸漁圖> 1803(순조 3)년 (59세) : <冠巖圖> 그림( 《高山九曲圖12첩》 병풍 중 제3폭). 1804(순조 4)년 (60세) : 이무렵 천식 등 병고로 시달림. 5월 5일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처음 差定 됨. <耆老世聯契圖>, <老梅圖>, <知章騎馬圖> 1805(순조 5)년 (61세) : 8월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祿取才에 마지막 참여함. <秋聲賦圖> 1809년말 이후 1809년 이전 어느 때 죽음. 1809(순조 9)년 : 純祖가 《海山帖》을 洪顯周에게 下賜함. 1818(순조18)년 : 아들 김양기가 《檀園遺墨》을 만듬. | |
| |
다시 안산으로 돌아와 안산은 어업과 염업(鹽業)을 중심으로 특히 소금업이 활발했던 곳이다. 그때는 지금 같은 천일염이 아니다. 천일염은 일제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때는 자염, 화염이었다. 그때는 바닷물을 직접 거대한 무쇠솥에 붓고 밑에서 엄청나게 불을 때서 증발시켜 만들었다. 그래서 도깨비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흉내 낼 수 있지만 감히 소금 만드는 일을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였다. 소금 한 가마를 내기 위해서는 땔감으로 엄청난 나무가 필요했고 소금은 모든 음식 맛을 낼 수 최고의 물품으로 상당히 비싸고 나라해서 전매한 품목이었다. 아무리 나라에서 전매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관리들과 커넥션에 의해 소금을 빼가는 경우가 많았고 그 빼가는 양에 따라 소위 자본축척이 이루어진다. 또한 염업은 그 인근의 산악지대를 초토화시켰는데 그래서 염업은 바닷가뿐만 아니라 나무를 조달하기 좋은 섬 지방에서 활발했다. 당시 육지는 그린벨트 개념이 있어서 벌목을 할 수 없는 제약이 많았던 데 비해 섬 지역은 남벌 등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도, 형도, 덕적도, 광덕산, 수리산 인근의 산과 섬들은 벌거숭이였다. 그 염업이 수도권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 시흥, 안산이었다. 그리고 담배 농사 또한 화성 남양만 일대에 많아서 아주 질 좋은 담배산업이 발달하였다. 앞서 이곳에 해군사령부가 있어서 경강과 수도권 해역을 지키고 있었으며 중국과 남도 땅으로 가고 들어오는 무역선과 배들이 정박한 무역항과 어항이었다. 그렇듯이 이 안산 지역은 역마와 역사가 발달했고 군사기지로서 관기와 찰방, 객사들이 즐비한 지역이었다. 이 곳 해군사령부 퇴역군인 중 무사 한 명이 있었는데 그 부인인 ‘명우지’가 있어 둘 다 중인으로 당시 유명한 검객들은 거의 다 중인계급들이었다. 특히 ‘명우지’는 한양에서 소문난 바느질쟁이였다. 명우지는 밝은 ‘明’자, 비 ‘雨’자, 손 ‘脂’자로 여기에 기녀와 기생이 많아 늘 패션너블하여 이렇듯 뛰어난 침쟁이의 활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앞서 수적 얘기를 했는데 수적들이 세곡선을 털어 이곳에서 팔아먹지 못하니까, 당시 오끼나와 등 해외 도서 등을 거점으로 거래를 했다. 우리나라 3대 도적이라 하는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 등을 성호 이익 선생도 언급했는데 홍길동이 오끼나와 율도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홍길동이 이미 율도와 인연이 있어서 간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장물들과 획득물을 유통하러 오끼나와까지 들어간 것이다. 수적들은 사실상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큰 무역상끼리는 서로 연결되어서 움직인 것으로 봐야 한다. 대부분 수적들의 형성은 이인좌 난이나 큰 민란이 평정되면 도망가서 수적이 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규모가 큰 수적들 간에서는 서로 안면이 있어 소통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행세께나 했던 대감이나 남쪽으로 내려온 지방의 현감들은 임금이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북쪽(임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면서 늘 중앙권력의 실세(實勢)로 들어갈 꿈을 꾼다. 그리고 엄청난 민중 수탈을 해서 이를 임금이나 정권 실세에 받쳐 판서를 얻고 관직을 얻는다. 지방의 현감이나 목사들의 1년 농사는 민중들을 수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창고를 터는 수적들이 많았다. 수령들이 ‘1년 농사’를 해서 배를 태워서 경강으로 마포로 보내는데 이를 바다 한가운데서 터는 것이다. 이 곳 초지진에는 조선 최대의 무사들과 퇴역군인들이 많았고 인근 수적들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이들이 와서 도움을 청하면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수적과 정당히 협상을 하여 물건을 다시 내 놓기고 하고 타협을 해주기도 한다. 나라에서 토포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수적들과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로 먹고 사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대부분 민란 주모자들의 경호무사로 있었던 사람들이 관군에 의해 평정될 때 도망가거나 수적이 된다. 그런데 한 하급무사가 이인좌의 난으로 검거된 수적과 역모를 했다 쫓기다가 광덕산 아래에서 죽게 되었다. 이미 부인은 만삭이 되어 퇴기의 집으로 가서 몸을 피하고 있다가 아기를 낳고 결국 죽었는데 그 아이가 단원 김홍도이다. 단원 김홍도는 관기 집에서 기녀들 손에 의해 자랐으며 안산 주변 장시(場市)들을 돌아다니며 장돌뱅이로 컸다. 기생 밑에서 커서 춤도 잘 추고, 젓대와 비파도 잘 불었다. 당시 기생은 조선 최고의 예인 집단이었다. 조선 문학을 보면 황진이, 명월 등의 예에서 보듯이 대부분 기생문화였다. 전적에 따르면, 김홍도는 아주 기골이 장대했고 아버지가 무사 집안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렇게 장돌뱅이로 돌아다니는 김홍도를 시장바닥에서 표암 강세황 선생이 유심히 보았다. 여기서 표암 강세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표암은 명문사대부 출신이다. 부친이 64세 때 강세황을 낳았는데 기질이 밝고 아주 해악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옛날 한양에서는 안산에 가면 일동에 성호가 있고 부곡동에는 표암 강세황이 있다고 할 정도로 알려져 있었으며 강세황은 조선 시대 예원의 총수였다. 강세황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는 남종산수화 (南宗山水畵)를 가져와서 이를 한국적 산수화로 정리한다. 그에 의해 비로소 한국적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것을 그냥 베낀 것이 아니라 ‘진경산수화’를 유행시킨 인물이다. 진경실경 산수화를 전반적으로 유행시켰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풍속화와 인물화를 널리 전파하였고 서양화법에 따른 입체감과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이었다. 원래는 서울 장충동에 태어났으며 조부가 예조판서, 아버지는 대제학까지 지낸 명문세족인데 친형과 장인이 이인좌에 난에 연유되면서 벼슬길이 막히고 밥 먹을 것을 걱정할 처지가 되어 32살에 처가인 안산으로 이주했다. 옛날에는 처가살이가 당연시되었다. 화법과 서법을 철저히 독학으로 하였고,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 또한 독특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다. 그 이후 추사 김정희가 있지만 그는 중국 그림을 흉내 내는 ‘새끼 중국인’으로서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오렌지족이었다. 강세황이 61살이라는 노령에 영조의 부름을 받고 출사했다. 66세에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 되는데 그 글과 그림이 뛰어나서 당시 청나라의 유명한 문예가들에게 칭송이 자자했으며, 예술담론 또한 뛰어나서 그들과의 논쟁에서 지지 않아 중국화단을 1년2개월 만에 싹쓸이하고 홀연히 돌아온다. 표암 강세황의 그림은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한국적으로 정리한 그림이다. 강세황 선생이 그림을 그릴 때가 32살에 안산에 내려와서 처가살이하면서 바닷가에 돌아다니면서 주로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화법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그림이었고, 당시 자기 얼굴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를 그렸다. 자화상을 보면 매우 해학적인 아주 낙관적인 밝은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강세황이 안산에서 바닷가들을 소회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자주 장터를 구경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재주가 있어 보이는 단원 김홍도를 만나게 된다. 그 때가 단원의 나이 7살 때의 일이다. 그 이후로 강세황 집으로 단원이 들어가면서 새 인생이 시작되는데 단원의 정신적·물질적 최고 후원자는 표암 강세황, 앞의 예인군주 정조대왕, 한양 최고 갑부인 안산의 소금장수 김완태였다. 단원은 얼굴이 잘 생겨서 시쳇말로 ‘얼짱’이었다. 풍체 또한 마치 신선과 같고 키가 훤칠하고 술도 잘 먹고 해학에 능했다. 그래서 단원 호중에 간혹 술 취한다는 ‘(醉)’자로 ‘취화사’라는 호가 있다. 표암이 전적에 그 제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대목을 보자. “찰방 김홍도는 자가 사능이다. 어릴 적에 내 집에서 컸다. 눈매가 맑고 용모가 뛰어나 익힌 음식을 먹는 세속 사람 같지 않고 신선과 같다.” 스승이 제자를 이런 정도로 칭송한 것을 보니 참 대단한 사람이다. “단원은 음률에 밝았고 거문고 젓대며 시와 문장 등 그 묘(妙)를 다하였으며, 풍류가 호탕했으며 (중략) 매번하였으나 단원의 마음을 스스로 아는 이만 안다. 단원이 사는 거처는 책상이 바르고 정돈되어 있었으며 집안에 있으면서도 곧 세속을 벗어난 듯하다. 세상의 용렬하고 옹졸한 이들은 사능이 어떤지 알지 못 하더라.” 단원이 청나라의 동지사행에 갈 때 실록을 보면 단원이 군관 직함으로 참여한다. 왜 도화서 화가 직함이 아니고 군관 직함으로 갔느냐 하는 점이 좀 의아하다. 하나는 말 그대로 단원이 기골이 장대하여 검객 자격으로 당시 세상의 중심인 연경을 보고 싶었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화가는 못 들어오게 하니 군관 직함으로 따라나섰다는 견해가 있다. 단원은 아마도 검술과 무술에 뛰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박제가, 이덕무가 지은 동양 최대의 무보지, 즉 『무예도보통지』의 무보(武步) 그림을 단원이 그렸다. 이미 단원이 무술을 알고 이에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무보지 삽화는 그림도 알고 무술도 알았던 단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단원이 군관 직함으로 갈 수가 있었다. 두 번째는 요즘 말로 최초의 간첩들이 화가들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고려 충렬왕 때 화가를 중국에 보내 중국 지도를 그려오게 했는데 간첩죄로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외국에 갈 때 화가들이 몰래 따라가 그 나라의 지도과 그림을 그려온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중국 지도와 그림 등이 필요했고, 중국에서는 그런 화가들을 못 들어오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화서 화가 중 김홍도가 선정될 수 있었으리라. 드디어 표암이 60세 넘어 출사하면서 단원을 도화서로 천거하고 21세 때 도화서 최고의 화가가 된다. 약관 21세에 한양의 예원을 정리해버린 작품이 바로 8폭짜리 병풍으로 그린 <신선도>이다. 기독교의 이데올로기화는 예수 궤적을 그리는 성화(聖畵)이다. 앞서 얘기한 남종문인화는 군신(君臣) 운운하는 유교를 이데올로기화한 일종의 종교화이다. 남종화가 ‘유교의 종교화’라는 것을 말하자면 아마도 한 학기 강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렇듯 남종화는 유교가 이상향이라고 보는 내용을 그린 종교화인 셈이다. 이 <신선도>는 도교적 이상화이다. 이 <신선도> 필체를 보면 대단하다. 풍속화 등에 보이지 않는 대단한 것으로 이 팔폭 <신선도>를 가지고 이미 21살에 거의 조선 한양 화단을 평정해버렸다. 당시는 유교 정통사관과 왕이 지배하던 시대였는데 이 도교풍의 <신선도>가 유교적 이데올로기 시대였던 조선 시대를 바로 부정한 것이다. 그것도 작게 그린 것이 아니고 팔폭 병풍을 그렸다. 감히 21살에 이런 야심만만한 필체를 썼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필치로 유교의 반대편에 있는 도교의 이상주의적 신성화를 그렸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했다. 단순히 그림을 잘 그렸다는 이유로 남종화를 그렸다면 누가 깜짝 놀랐겠는가? 그러나 이는 문화적 반향이다. 당시 최고 이데올로기인 사대부 이데올로기를 유교에 대해 직선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이를테면 1970년대 반공 이데올로기가 전사회적으로 유포된 박정희 시대 때 북한 주체미학의 보천보 전투를 그린 것과 똑같다. 이 그림의 시대적 의미를 봐야 한다. 필체와 그 그림이 함유하고 있는 엄청난 정신적 의미 때문에 그야말로 한양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풍속화 하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을 드는데, 여기에 오원 장승업까지 하여 조선 시대 ‘삼원’ 운운하는데 그 중 오원은 한참 격이 떨어진다. 도화서 화원들은 대부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데 집안내림이었다. 그런데 단원 같은 경우는 특별한 경우였다. 단원은 족보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없다. 무인 집안이었다. 단원보다 13세 연하인 혜원은 아버지가 대단한 화가였다. 혜원 아버지가 영조 어진을 그릴 때 단원이 참여한다. 혜원과 단원 그림이 어떻게 다른가? 단원 풍속화는 농촌공동체인데 반해, 혜원 풍속화는 당시 한양 오렌지족들의 도시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혜원은 단원을 좋아했는데 그 좋아한 티를 안낸다. 예술가는 2등보다는 1등만 필요하다. 예술가들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고, 보이지 않는 위계(位階) 질서가 쫙 서 있다. 무엇보다도 예술 자체의 독특한 가치가 중요하다. 고흐 시대는 고흐처럼 그렸던 화가들이 200명이 넘었다. 어떤 그림은 고흐보다 더 잘 그렸다. 고흐가 유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흐만 남고, 나머지는 익명의 그림으로 역사 속에 다 사라져 버렸다. 혜원이 단원의 풍속화를 보고 굉장히 감동받았으나 혜원은 역시 고수(高手)였다. 그는 농촌 대신에 한양의 뒷골목과 도시적 정취에 파고들었다. 단원의 필치는 아주 부드럽고 정감 있는데 반해, 혜원의 필치는 선이 아주 모던하고 날카로워서 도시적 건달풍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혜원이 단원을 따라간 부분도 있다. 단원이 우물가 내지는 개울가에서 남정네들이 아낙네들을 훔쳐보는 그림을 혜원이 도시적 풍경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그리고 혜원의 풍속화 뒷배경의 나무와 산세는 단원의 풍경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혜원은 그만큼 단원 존경하고 경외했으면서도 단원과는 다른 세계를 펼친 것이다.
정조대왕의 어진을 단원이 세 번이나 그렸는데 역사적으로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조가 단원을 현감으로 제수하는데 도화서 화원 중 가장 출세한 것은 현감이다. 겸재 정선이 현감이었고, 그 다음이 단원이었다. 단원은 48세에 연기 현감으로 제수 받는다. 21살에 도화서에 들어가서 궁중화가로서 유명세를 날리고 그 사이 어명으로 금강산을 네 번이나 갔다. 한 번 가는데 최소한 약 5-6개월이 걸렸다. 어명으로 수많은 궁중행사 그림을 그려야 했다. 창덕궁의 엄청나게 큰 벽화인 해군 성도를 그릴 사람은 단원밖에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 초지진 해군사령부를 봐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이 역시 그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좀 행세께나 했던 대감들과 권력께나 한 양반들은 단원에게 그림 부탁을 하면서 그려주지 않으면 엄청난 시기와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연기현감으로 내려가서 쉬엄쉬엄 놀면서 못했던 악기도 다루어가며 여유를 가졌을 법하다. 42세에 내려갔는데 그 나이 때는 인생에서 두 번째로 자신을 자각할 나이였다. 또 화가로서 유명세와 그 어지러운 궁궐생활을 늘 봐왔기에 이제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즈음이다. 그래서 연기현감으로 내려갔을 때 말에서 내려 연기 현청이 보이자마자 속적삼을 쫙 찢어 오른손을 둘둘 감고 내가 낙상하여 오른손을 다쳤노라고 말했다. 조선 최대 화가가 내려왔으니 그 곳에서도 그림 부탁이 오죽했겠는가? 그때마다 손을 다쳐서 ‘나는 그림을 못 그리네’라고 핑계를 댔을 것이다. 어떤 미술사학자들은 단원이 다쳤다고 하는데, 그때 다쳤다면 그 뒤에 그림풍이 달라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좋아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인의 집안으로 군관직함으로 동지사까지 갔던 검객이 어떻게 낙상을 했겠는가? 그 조용한 시골 땅에서 내려와 궁궐의 지긋지긋한 암투를 벗어나 그런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김홍도가 내가 누구인가 내 인생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즉 자기 성찰의 기간인 것이다. 그때 나온 그림이 바로 ‘풍속화’이다. 풍속화는 그냥 그린 것이 아니다. 그냥 민중의 삶을 그리자고 작심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세간에 풍속화가 단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무렵에 나온 풍속화는 고작 24점이 단원 풍속화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김홍도 작품으로 그림들이지, 화가 자신이 직접 낙관을 찍고 확인한 것은 24점뿐이다. 그 크기도 일반 노트를 펴놓은 정도 크기의 화첩이다. | |
풍속화에 나타난 단원의 고향 안산 | |
단원 김홍도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단원 김홍도 표준 영정. 1981년 단원의 자화상이라 여겨지는 포의 풍류도(布依風流圖) 그러나 불행히도 이 그림 역시 그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리얼리티가 있는 <자화상>은 아니다. 간결한 필선으로 음영 없이 처리한 탓에 가시적인 두드러짐이 강세황이 71세 때 직접 그린 영정(보물 제 590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진다. 결국은 아무리 고서를 뒤적여도 김홍도의 초상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출처] 단원 김홍도 흉상의 정체 (미술품투자카페) 작성자 물망초 | |
'한국의 미술 > 조선시대의 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반차도 [正祖斑次圖] (0) | 2011.02.02 |
---|---|
우리의 기록역사 - 조선왕조의궤 (0) | 2010.11.09 |
조선시대 선비의 멋, 사군자 - 호암미술관 편 (0) | 2008.10.12 |
김홍도의 금강산 여행과 진경산수 화첩 - 금강사군첩 (2) | 2008.10.12 |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4) | 2008.10.12 |
도화서와 화원 (0) | 2008.10.11 |
김홍도의 풍속화와 배경 (0) | 2008.10.11 |
신윤복의 풍속화 (1) | 2008.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