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미술관에서는 사군자를 주제로한 전시회가 열려, 옛 선비들의 묵향(墨香)을 한껏 음미할 수 있는 유익한 전시회가 열린적이 있었지요. 호암미술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사군자의 의미와 정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습니다.
시류에 따라 아니 그보다 앞서 변신해 가는 것이 능력과 미덕이 되어버린 지금, 사군자의 변치 않는 생태적 특성을 군자에 비유하며 숭앙했던 옛 선비들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한꺼번에 일컫는 사군자(四君子)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고 싱싱함을 유지하는 이 식물 고유의 특별한 속성이 마치 인품과 학식을 겸비한 군자와 같다고 보고 네 명의 군자라 부른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흔히 ‘매란국죽’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의 장점을 잘 보여주는 계절을 춘하추동의 순서에 맞춰 배열한 것입니다.
사군자는 일찍부터 동양 예술의 주요 소재로 사용되면서 충성, 절개, 지조, 은일(隱逸)과 같이 유교에서 숭상하는 도덕적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시와 그림의 소재로 애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문인화가 대부분이 사군자를 다뤘으며 특히 사군자를 잘 그려 이름을 날린 화가도 많습니다.
조선 제일의 묵죽화가로 알려진 탄은(灘隱) 이정(李霆, 1541∼1622), 이정을 계승한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 1675∼1756),
난초 그리기와 서예의 관련성을 더욱 강조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매화 그림의 대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
난초 그림의 쌍벽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그림 관련 업무를 전담했던 화원(畵員)의 선발 시험에서 묵죽(墨竹)이 가산점이 가장 높은 과목으로 책정되는 등 사군자는 문인화가 뿐 아니라 직업화가들에게도 매우 보편적이고 인기있는 소재였다. 또 백자를 굽는 관요(官窯)에 파견된 화원들은 도자기 표면을 장식하기 위해 사군자를 즐겨 그렸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가치판단은 유보한 채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사군자라는 주제는 자칫 현실성이 없고 고리타분하고 것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군자에는 단순히‘옛’것으로 치부해 버리기 힘든 도도한 연륜과 삶의 깊이가 배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군자를 벗삼아 올바르고 깨끗하게 살고자 했던 선인들의 노력을 돌이켜보고, 오늘을 사는 지혜를 한 수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매조(梅鳥)
전(傳), 창강 조속(滄江 趙涑, 1595∼1668)
조선,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종이·수묵
84.0×46.0 cm
조속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여 세간에서 지조있는 선비로 존경받았던 인물이다. 아울러 시·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묵매(墨梅)와 화조화를 잘 그려 이름을 날린 문인화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조속의 솜씨로 전해지는데, 매화가지가 왼쪽으로 치우쳐 뻗어 나간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조형적 긴장감이 느껴지며 먹선도 맑고 깔끔하다. 매화가지 끝을 뚝 부러진 것처럼 묘사하고 꽃보다는 가지의 꺾임을 강조하여 그린 것은 조선 중기 묵매도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다.
홍매 대련(紅梅 對聯)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 1789∼1866)
조선, 19세기 중엽
종이·담채
각145.0×42.2cm
조희룡의 대표작으로, 지그재그로 구부러진 굵은 매화 줄기의 일부를 클로즈업하여 화면의 세로 방향에 따라 배치하는 대담한 구성이 돋보인다.
무수히 핀 붉은 매화 송이 외에도 줄기 곳곳에 많은 태점을 찍어 다소 번잡한 느낌을 주는데, 이렇게 꽃이 많고 구도가 복잡한 것은 중국 청대(淸代) 매화도의 영향 때문으로 짐작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화면 내에 조희룡의 관지는 없지만 근대 서화가이자 대수장가였던 김용진(金容鎭, 1878∼1968)이 1947년에 쓴 후제(後題)에서 조희룡의 그림임을 밝히고 있다.
묵란(墨蘭)
옥산 이우(玉山 李瑀, 1542∼1609)
조선, 16세기 말∼17세기 초
종이·수묵
43.6×30.0cm
이우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넷째 아들이자 율곡 이이(李珥)의 동생이다. 시·서·화·금(琴)을 다 잘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렸으며, 그림은 어머니의 화풍을 따라 초충(草蟲), 사군자, 포도 등을 그렸다.
농담의 변화가 능숙한 필치로 유려하게 그린 난초는 이파리가 방향을 바꿔 꺾이지 않고 길게 뻗어나갔다. 이러한 난법은 중국 원(元)·명대(明代)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조선중기 묵란도는 대부분 이러한 방식으로 그려졌다. 유례가 적은 조선 중기의 묵란도로서 회화사적 의의가 큰 작품이다.
향란독무(香蘭獨茂)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조선, 19세기 전반
종이·수묵
26.0×36.0cm
향기로운 난초가 홀로 무성하게 피어 있음을 탄식한 공자의 이야기 가운데 충신(忠臣)에 비유된 난초를 주제로 하여 그린 상징성 강한 작품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그것은 인품이 고고(高古)하여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 쉽게 손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정희 스스로도 배우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남김없이 할 마음을 잃어버려서 그리지 않은 것이 이미 이 십여 년이나 되었으며, 사람들이 요구하지만 일체 못하는 것으로 사절하였다고 말한 바 있듯이 그의 묵란도는 얼마 되지 않지만 모두 고담한 운치가 느껴진다.
노근묵란(露根墨蘭)
운미 민영익(芸楣 閔泳翊, 1860∼1914)
조선, 20세기 초
종이·수묵
128.5×58.4cm
민영익의 난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대원군의 석파난(石坡蘭) 스타일과는 달리 짙은 먹을 써서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노근란’이라 하여 뿌리가 드러난 난초를 그렸는데, 이것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말(南宋末) 유민화가(遺民畵家) 정사초(鄭思肖)의 고사(故事)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민영익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어 있다.
화면 곳곳에 안중식(安中植),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1878∼1950이후), 이도영(李道榮)이 그림 감상 후에 쓴 글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국화와 잠자리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
조선, 18세기
종이·淡彩
22.0×16.0cm
사군자 가운데 가장 늦게 유행한 국화는 18세기가 되어서야 널리 그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남종화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심사정의 묵국도(墨菊圖)가 가장 이른 예이며, 심사정이 그린 사군자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국화이기도 하다.
심사정은 당대부터 산수보다는 화훼(花卉)와 초충(草蟲)에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자신의 장기를 살려 밝고 부드러운 화훼초충도의 분위기를 냈다. 국화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황국(黃菊)과 함께 구기자와 잠자리를 화사한 담채로 그렸다.
국화(菊花)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조선 18세기 말
종이·담채
27.0×37.0cm
국화는 은일(隱逸), 인고(忍苦)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으로, 그 상징성과 관련하여 은군자(隱君子), 은일화(隱逸花), 중양화(重陽花), 오상고절(傲霜孤節), 상하걸(霜下傑), 동리가색(東籬佳色) 등으로도 불린다.
이 작품은 탐스럽게 핀 황국(黃菊)과 백국(白菊)을 그린 것으로, 먹과 담채의 농담을 미묘하게 조절하여 가을의 소슬한 분위기를 더욱 살리고 있다.
기국연령(杞鞠延齡)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
조선, 1913년
종이·담채
143.5×45.5cm
'구기자와 국화가 사람의 목숨을 연장한다’는 제목의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화원(畵員) 가운데 마지막 대가인 안중식이 그린 것이다. 안중식은 조석진(趙錫晋)과 함께 장승업의 화풍을 계승하여 산수, 인물, 화조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기량을 과시하였으며, 구한말과 근대 화단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8폭의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에 포함된 이 작품은 상서로운 상징성을 지닌 여러 소재들을 그린 것으로, 대범한 필묵의 효과와 색다른 소재의 구성이 눈길을 끈다.
묵죽(墨竹)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41∼1622)
조선, 17세기 초
비단·수묵
122.8×52.3cm
이정은 세종의 현손(玄孫)으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는데, 특히 묵죽을 잘 그려 조선 제일의 묵죽화가로 칭송되었다.
댓잎의 끝이 가늘고 날카로우며 꼿꼿하게 마무리져 있어 대나무의 고결한 기상이 느껴지는 한편, 가까운 곳의 대나무는 농묵(濃墨)을 써서 분명하게 그리고, 뒤쪽의 대나무는 안개에 싸인 듯 담묵(淡墨)으로 은은하게 표현하여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정 이후의 조선 묵죽화는 거의 그의 양식을 토대로 하여 발전하였다.
묵죽(墨竹)
수운 유덕장(岫雲 柳德章, 1675∼1756)
조선, 1747년
종이·수묵
각119.5×67.5cm
유덕장은 조선초기의 신잠(申潛), 신사임당(申師任堂) 등과 함께 최고의 묵죽화가로 이름이 높았던 유진동(柳辰仝)의 6대손으로, 가문의 전통에 따라 묵죽화에 전일(專一)했던 사대부화가이다.
가전(家傳) 화풍보다는 탄은 이정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정의 화풍을 계승하였으며, 이정, 신위(申緯, 1769∼1847)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힌다. 유덕장의 묵죽은 이정에 비해 좀더 부드러운 필치를 보여주며, 추사 김정희가 평한 대로 창경(蒼勁)하고 고졸(古拙)한 맛이 있다.
이 작품은 유덕장이 73세 때 그린 만년작으로, 전체는 8폭이지만 일부만 전시하였다.
기석경절(奇石勁節)
운미 민영익(芸楣 閔泳翊, 1860∼1914)
조선, 20세기 초
종이·수묵
133.5×59.0cm
민영익은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중국 상해로 영구 망명하여 서화가로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작품세계는 주로 묵란을 중심으로 논의되지만 묵죽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던 서울의 집을 ‘죽동궁(竹洞宮)’이라 하였고, 대나무가 울창한 상해의 집을 ‘천심죽재(千尋竹齋)’라고 불러 대나무에 대한 각별한 애호를 표시하였다. 이 작품은 줄기의 위 아래를 잘라 배치하여 대나무의 솟구치는 기세를 강조하는 한편, 짙은 댓잎들은 아래를 향하게 그려 넣어 화면 내에 긴장감을 유도하고 있다.
청죽(靑竹)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
1922년
비단·채색
190.0×143.0cm
김규진은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활동한 대표적인 서화가로, 젊은 시절 8년간 청나라에 머물며 서화를 수련하였고 귀국 후에는 어린 왕세자였던 영친왕의 서법사부로 임명되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는 행서와 초서, 특히 손수 만든 큰 붓으로 쓰는 대필서(大筆書)에서 특출한 필력을 발휘하였고, 그림은 힘차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군자 등의 문인화에 치중하였다.
그의 묵죽도는 수묵만으로 호쾌하게 그린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인데 비해, 이 작품은 화려한 채색을 써서 아름답고 세밀하게 그린 것이다.
춘작희보(春鵲喜報)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조선, 1796년
종이·담채
26.7×31.6cm
보물 782호
김홍도 만년의 대표작인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중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이 화첩에 그려진 그림들은 일상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을 산수 배경 속에 그리되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도록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대나무 몇 그루와 함께 이리저리 휘어져 자란 매화나무에 네 마리의 까치가 앉아 우짖고 있는 이 작품은, 그림 공부 지침서인 화보(畵譜)의 구도를 본 뜬 것이지만, 미묘하게 농담을 조절하여 풀어낸 필묵과 따뜻하고 서정적인 담채(淡彩)의 표현이 김홍도의 독자적 개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화훼(花卉)
필자미상(筆者未詳)
조선, 17세기
종이·채색
각165.4×52.3cm
각 폭마다 몇 종류의 꽃나무를 섬세하고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린 이 작품은 지질(紙質)이나 화풍으로 볼 때 상당히 오래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꽃 그림에는 쌍쌍이 짝지은 새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로지 꽃만이 묘사되어 있어 주목된다. 매화는 달밤에 피어나는 전통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이 작품에서는 홍매와 백매 두 가지가 같이 나타나며 아래쪽에는동백과 수선화가 배치되었다. 황(黃), 홍(紅), 백(白)의 삼색 국화는 장미와 패랭이, 양달개비와 함께 표현되었다.
백자철화매죽문호(白磁鐵畵梅竹文壺)
조선, 17세기
고36.9, 구경14.0, 저경14.1cm
조선 중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조선시대 선비의 곧은 기개를 보듯 기운차게 그려진 그림 맛이 일품인 항아리이다.
대나무와 매화를 따로 나누어 그렸는데, 수묵화(水墨畵)를 그리듯 대담한 필치로 능숙하게 그렸으며, 철화 발색이 자연스러운 농담에서 속도감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마치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를 보는 듯 하다.
청화백자사군자문각병(靑華白磁四君子文角甁)
조선, 18세기
고22.9, 구경3.7, 저경9.8×9.8cm
사각병(四角甁)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새롭게 등장하는 형태로, 그 위에 사군자(四君子)나 풀꽃을 그려 장식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형태도 깔끔하지만 각 면에 능숙한 솜씨로 그려진 매난국죽(梅蘭菊竹)의 그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엄정하면서도 깔끔한 형태와 그림과 배경의 선명한 색 대비는 강직과 충성을 상징하는사군자(四君子)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http://kr.blog.yahoo.com/shong3000/4711
'한국의 미술 > 조선시대의 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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