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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조선시대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강릉

죽은 후에도 왕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 강릉으로 들어가는 숲길.

한적하고 인적 없는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 있는 맵시로 함초롬히 서 있는 홍살문과 정자각이 있다. 숲에 숨어 있다 소나무 사이로 나타나는 왕릉을 찾을 때마다 이들을 넋을 잃고 쳐다본다.

조선왕릉을 찾는 이유는 드러내지 않아도 저절로 고아한 품위가 느껴지는 숲과 그 뒤에 살며시 감춰진 정자각이 우아하게 기와지붕과 방풍판의 곡선을 드러내는 순간 느껴지는 짜릿함에 반했기 때문이다.


▲ 소나무에 숨듯 살며시 나타나는 강릉 정자각.

적갈색 방풍판의 배흘림 곡선은 간소한 정자각의 품위와 미적 감각을 살려주는 백미다. 왕릉은 왕궁처럼 호화스럽거나 화려한 건물이 줄지어 있는 곳이 아니다. 왕릉에 눈높이를 맞추면 내로라하는 명문양반가 묘를 봐도 눈에 차지 않는다.

웬만큼 족보가 있다는 가문의 묘에 오히려 왕릉보다 더 화려한 재실과 사당을 지어놓고 있지만 왕릉의 품위는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

"에구, 아무리 치장해도 왕릉에 대면 어림도 없어!"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왕릉과 일반 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고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한데, 눈만 높아져서 전생에 능참봉이었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우쭐대는 격이다. 갑자기 조선왕릉에 미쳐서 연재를 쓰고 있으니 전생이 능참봉쯤 될 거라고 생각한다.

왕릉의 멋은 숲과 풍수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과 왕비라는 명성, 그리고 왕과 왕비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품위를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얼핏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상설구조지만 왕릉마다 스며 나오는 색깔도 다르고 개성도, 숨어있는 이야기도 다르다.

강릉을 들어서면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호젓한 숲길을 걸어 들어간다. 13대 명종(1534-1567)과 인순왕후(1532-1575) 심씨의 쌍릉인 강릉(康陵)은 태릉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고 비공개 왕릉이다.

태릉이 연간 3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활짝 열린 왕릉이라면 강릉은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는 한적한 왕릉이다.

권세를 휘둘렀던 어머니 문정왕후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달렸던 명종의 마마보이 성품대로 지금도 기가 죽어 있는 왕릉이다. 태릉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알아도 강릉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니 생전의 행적과 죽은 후의 모습도 어찌 이리 닮았을꼬.

여담이지만 왕릉에 관계된 이야기 중 왕이 죽고 나서 명당자리를 찾아 묻어도 생전의 팔자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왕릉 관계자들에게 회자된다.

제 아무리 천장을 해도 그 팔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운명대로 들어간다니 왕과 왕비는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 벗어나지 못하는 팔자를 지니고 태어났나 하는 운명론까지 뒷담화에서 거론된다.

일국의 왕과 왕비를 지냈던 운명이 평범한 사람의 인생과 어찌 비교될까 하지만 이런 뒷담화도 왕릉답사를 하다보면 저절로 공감이 간다. 태강릉의 현재 모습도 당시 문정왕후와 명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활짝 열린 태릉보다 깊은 숲 속에 숨어 문을 닫아걸고 있는 강릉이 내 왕릉답사 만족도가 훨씬 높다. 잘생긴 적송이 품위 있게 둘러서고 청아한 소나무 향이 뿜어나오는 강릉은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마마보이 국왕 명종

명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20세까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며 그 이후도 국정은 거의 문정왕후의 손에서 좌우됐다. 22년 간 재위했지만 왕의 종아리를 치며 욕설도 서슴지 않던 무서운 어머니의 압박에서 벗어난 기간은 2년도 안 된다.

국가경영자가 어머니에게 눌려서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지낸 결과 매관매직, 무거운 세금, 을묘왜변, 임꺽정 출현 등 국정이 어지러웠다.


▲ 인적 없는 고요한 숲에 있는 태릉 정자각의 지붕 사이 적갈색 방풍판은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며 곡선이 유연하게 흐르는 배흘림이 정자각의 품위를 돋보이게 한다.

명종대는 유난히 지진과 우박이 많고 천둥번개의 피해 기록도 많다. 제철이 아닌 때 진달래꽃이 피고 살구꽃이 피며 열매가 맺는 일도 여러 차례 있어 기상이변 현상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명종 17년(1562) 4월 4일(음력) 경기 여주 죽산에 서리가 내리고 전라도 진안에 서리가 내렸다.

사관은 이에 대해 "4월에 서리가 자주 내리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바고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잘못되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반응하는 법이다. 지금 원형(元衡)과 통원(通源)에 조정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양(李樑)의 당이 요직에 포열 하고 있다. 날마다 함께 도모하고 의논하는 것들이 나라를 그르치고 임금을 그르치는 계책 아닌 것이 없었으니, 하늘이 잇달아 경계를 보임이 당연한 일이다"라고 윤원형 일파 외척의 횡포를 따끔하게 비판했다.

명종 10년(1555년) 1월 28일, 강원 관찰사 정준이 올린 장계에서 두견화가 봄처럼 피었다고 명종이 불안해하자 "하늘과 사람은 하나의 이치로 되어 간격 없이 서로 통해 있기 때문에 인사가 잘못됨에 따라 하늘이 변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지금 이단이 날로 퍼져 음기(陰氣)가 매우 성해졌으니 변괴가 계속되는 것이 괴이할 것 없다"고 신랄하게 문정왕후의 국정간섭을 꼬집었다.


▲ 강릉의 문인석도 코가 크고 거대해 문정왕후 태릉 석물을 닮았다.

명종 9년(1554년), "흉년에 죽어가는 사람은 모두 농사짓느라 부지런히 고생한 백성들이고, 손발도 까딱 않고 놀고 먹는 중들은 배를 두드리며 앉아 있으며, 백관의 녹봉은 줄였어도 양종(兩宗)의 허비를 줄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시급하지 않은 일들을 정지하고 그만두어도 될 비용을 줄인다면 흉년을 구제할 수 있어서 민심이 자연히 화합될 것입니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명종은 국고가 고갈되면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면서 이런 폐단을 제거하려고 하는데 양종이 허비하고 있다는 말만은 알지 못하겠다고 한다. 벼슬아치 승려 수를 줄일 수 없다는 소리다.

사관은 실록에 "폐단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분부는 옳지만, 또한 '양종이 허비하는 것은 알지 못하겠다' 하였으니, 이 어찌 임금이 자신을 반성하는 의리이겠는가. 한탄스럽다"고 양종 부활 폐단을 어쩌지 못하고 문정왕후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명종을 비난한 글을 남겨놓았다.


▲ 병풍석을 두른 명종과 인순왕후 쌍릉.

어머니가 죽자 모처럼 어머니의 굴레에서 벗어난 명종은 윤원형 일파를 제거하고 보우를 유배보내며 말 많던 양종을 폐지하는 등 문정왕후의 권력남용으로 혼란한 국정을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2년도 안 돼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

명종은 왕비 1명에 후궁 하나 두지 않고 슬하에 순회세자 한 명만 낳는다. 순회세자(1551~1563)는 13세에 죽고 명종에게 더 이상 후사가 없었다.

여자를 유난히 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순왕후와 유독 금슬이 좋았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순회세자를 잃고도 후궁을 두지 않았던 명종이 정상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젊은 명종은 인순왕후에게 더 이상 후사가 없자 미리 후계자로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선조)을 지목했다.

중종은 왕비 3명과 후궁 7명 사이에 9남 11녀를 두지만 대윤과 소윤의 싸움에 말려들어 목숨을 잃고 그 중 살아남은 왕자는 창빈 안씨 사이에 낳은 중종의 7째아들 덕흥군밖에 없었다.


▲ 거대한 강릉 무인석은 태릉의 무인석과 비슷하지만 태릉 무인석에 비해 기세가 죽었다. (무인석 크기 비교 사진 모델은 창경궁 지킴이 진정임씨)

문정왕후는 왕자의 씨를 말려놓았고 어머니의 죄업이 아들 명종에게 후사를 주지 않는 것으로 돌아온 것일까?

명종이 어머니를 뒤따르듯 죽자 16세의 선조가 즉위했고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인순왕후는 1년 만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선조8년(1575년) 44세로 승하해서 명종의 곁에 묻힌다.

인순왕후의 시호를 올리면서 어질 인(仁)에 어질고 부드러운 것을 말하는 순(順)을 쓴다 했던 것이나 수렴청정을 일찍 거둬버린 것으로 보아 명종과 마찬가지로 어지간히 숨을 죽이고 소심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석물도 어머니 영향권에서 못 벗어나

▲ 커다란 코가 붙었지만 기개가 없는 무인석.
강릉의 석물은 태릉과 크기나 생김새가 거의 비슷해 거대하지만, 태릉의 무인석이 오만방자하고 권세가 당당한 모습에 반해 강릉의 무인석은 어딘가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다.

문정왕후의 영향이 살아남아 있어 석물은 거대하고 문정왕후에게 기가 눌려지냈던 명종 부부는 어울리지 않게 팔자에 없는 병풍석까지 두른다.

두 능상의 인석은 맞닿아 있어 억지로 병풍석을 두른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왕릉 중에 인석이 닿을 정도로 좁은 능상 사이에 억지로 병풍석을 두른 왕릉은 강릉밖에 없다.





▲ 좁은 두 능상 사이에 억지로 병풍석을 두르다보니 인석이 맞닿았다.

명종의 장사에 대신들은 선조가 어리다면서 장례에 참석하지 말 것을 권유했고 선조는 참석하지 않았다. 임금이 참석하지 않은 장사에 신주를 세우는 제를 지낼 때 고위 대신들은 헌관(獻官) 되기를 꺼려해 왕실종친이 대행했다.

이에 뜻 있는 이는 산릉의 석물이나 의장은 예전보다 사치스럽고, 예문이나 상제는 예전보다 못해져서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한탄한다. 명종의 국장은 석물은 화려했으나 대신조차 잔 올리기를 꺼려해 빛 좋은 개살구 격으로 푸대접을 받은 셈이다.


▲ 대신을 상징하는 문인석은 왕과 왕비의 명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지만 진짜 의중은 어떨지 의문이다.

선조4년 강릉에 불이 나자 선조는 5일간 소복을 입고 정전(正殿)을 피했고 반찬 수를 줄이고 풍악을 금했다. 조회와 시장을 정지하고 사형을 없앴으며 3일간 도살을 금지했다.

태강릉의 명칭조차 왕비였던 어머니가 먼저고 왕이었던 명종은 뒤에 붙어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마더콤플렉스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왕의 팔자는 죽으나 사나 매한가지라는 뒷담화가 다시 떠오를 수밖에.



덧붙이는 글

◎ 태강릉 지구관리소는 ‘시민과 함께 하는 숲 가꾸기(비료주기) 및 환경정비’ 프로그램을 마련해 태강릉 숲에 시민이 전통소나무와 조경수 심고 가꾸는 행사를 개최한다. 지난 식목일에 심은 나무는 번호표를 부여해 시민이 직접 심은 나무를 가꾸고 돌볼 수 있으며 가족단위로 문화재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행사일 : 2005.11.13(일) 10:00~14:00
장소 : 태강릉 능역
대상 : 예약 또는 당일 접수자 및 금년 식목일 행사 참여자
내용 :*식목일 식재한 전통소나무(200주) 및 봄철 식재한 조경수(300주) 비료주기

*접수자는 수표실에서 번호표 수령하고 지정한 장소로 이동. 준비물을 제공받아 지정목에 비료를 주고 쓰레기 줍기 등 환경미화 운동하기
*행사 참가자 소그룹단위별 폴라로이드 즉석사진 촬영 및 선물
*행사가 끝난 후 조선왕릉 능침 관람 및 숲속 길 체험 참가

준비물 : 번호표, 비료, 삽, 호미, 장갑 (현장에서 무료제공)



◎ '태강릉 조선왕릉 개방'

'조선왕릉 개방' 프로그램은 비공개 왕릉 능상까지 관람하고 단풍이 고운 태강릉 가을 숲을 등산할 수 있으며 문정왕후 시대 역사를 음미해볼 좋은 기회다. 능상에 올라가 석물을 볼 수 있으며 이상현 관리소장이 직접 조선왕릉 해설을 맡는다.

개방기간 : 11월 01~ 30일까지 매주 토요일, 일요일
개방시간 : 11:00 14:00 16:00시(1일 3회)
관람인원 : 선착순 50명
관람증 배부 시간 및 교부 장소 : 관람 20분 전 태릉 능침 서쪽 입구
문의 및 접수처 : 태강릉 지구관리소 02) 972-0370

2005-11-12 12:4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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