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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

임진왜란 당신 한국으로 귀화한 장수의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모하당 김충선, 그는 일본이 한국을 쳐들어온 임진왜란 당시 그의 수하 3000여명을 이끌고 조선군에 투항했다. 이후 이들은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향해 총포를 쏟았다. 일본 측에서 보면 때려죽일 역적이지만, 한국의입장에서 영웅으로 추대할 만한 인물이다.

김충선 과연 그는 누구인가?



<조선왕조실록>에 두번이나 그 이름이 올라와 있는 김충선은 임진왜란 당시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군 장수로 그의 실명은 사야가(沙也可)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조선의 수준 높은 문물을 보고 흠모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박진에게 항복한 뒤 귀부(歸附)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동래성으로 상륙한 지 다음 날이었다. 이때 사야가는 박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동래성으로 상륙한 다음날로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라며 조선에 투항하겠다는 뜻을 적어보낸 사야가의 편지를 받은 박진과 김응서는 그의 귀화를 고심 끝에 찬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이 책은 편년체로 년과 월에 따라 사실적으로 서술한 책입니다.)

그는 실제로 조선을 쳐들어왔을 당시, 자신의 생명이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모를 들쳐얻고 도망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제 목숨하나 부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부모님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은 계속되는 전쟁속에서 살아온 사야가에게는 꽤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김충선은 경상도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도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1597년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 휘하로 울산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무관 정3품인 가선대부를 하사받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 조총개발에도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무기는 활과 창, 검이 전부였다. 왜군은 조총부대를 선두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굉음과 함께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을 본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연전연패했다. 조선군 입장에서는 조종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일본에서도 철포대라 하여 조총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김충선(사야가)은 조총 개발을 건의하였고, 이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 장군 또한 이미 조총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김충선의 가세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왔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김충선은 정유왜란,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웠다.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의 성을 하사 받았다. 그리고 그의 충의와 선의를 길여 충선이라 이름지었다. 그에게 대구쪽에 땅을 하사하여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었다. 

(김해 김씨를 준 이유가 가야가 망하면서 많은 가야인이 일본으로 향했고 결국 돌아온 것이므로 김해 김씨를 준 것이 아닐까..)

김씨 중에는 사성 김씨가 있는데 시조가 김충선으로 나온다. 이는 귀화한 김충선의 후손들이며, 아직도 대구지역에는 사성 김씨의 집성촌이 남아있다.





일본에서도 사야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장수에 관한 자료가 없을뿐만 아니라 사야가라는 이름의 장수 또한 없다. 그로 인해 조선왕조실록과 사야가가 직접 쓴 모하당문집의 내용을 토대로 이를 추정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로 손꼽히는 것이 하라다 노부타네이다. 그는 인진왜란 당시 가토와 함께 조선으로 출병하였고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사라졌다. 그는 철포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반 히데요시 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누구였으며, 그가 어떠한 연유로 조선으로 귀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임진왜란 뿐만 아니라 조선의 위기가 있었을 때마다 출병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사야가는 진정 조선을 사랑한 인물로 조선을 위해 자신을 모든 것을 받친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뎃글에서 발췌한 것들..


모하당 김충선을 모신 곳이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의 녹동서원입니다.
또 대구에는 임진왜란 때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군 두사충의 후손들도 살고 있습니다. 사당은 모명재입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인과 명나라 사람의 후손이 함께 있던 묘한 곳이 대구라고 생각됩니다.


김충선의 귀순 동기는 여러가지가 돌고 있었군요.
제가 본 어떤 서적에선 왜군들이 아녀자들을 겁탈하려 어떤 여인을 쫒는데 그 여인이 넘어진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치마를 여미는 것을 보고 백성들조차 도의를 안다 감동해 귀순을 결심했다는 얘기가 있었죠. 모방송국에서 김충선을 소개할때는 왜군들의 만행에 한탄하며 귀순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사유야 어찌됐든 그는 이순신장군의 전투에도 도움을 줬다는 후일담이 있고 그의 충성심은 일회성이 아님을 증명하는 여러 일화가 있습니다

김충선이 나이를 먹어 낙향해 있을때 조선에선 한때 도성이 점령당하기도 하는 이괄의 난이 일어납니다. 이때 김충선은 노구임에도 임금이 위험하다하며 군사들을 이끌고 상경해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웁니다. 그는 이미 일본인이 아닌 뼛속까지 조선인이었음을 알수 있죠.

임란때 조선군은 어느 시기를 넘어서 조총부대가 대량으로 조직되고 왜군과의 접근전에서도 밀리지않게 되는데 왜군의 모든 것을 알고있던 김충선과 귀순한 많은 왜군들의 도움이 있었음을 알수있습니다. 귀순한 왜군들은 부대를 조직해 전투에 나가 많은 이가 죽기도 했습니다.

토요토미의 징집명령에 따라 조선원정에 참가하기는 했으니 토요토미와 적대관계에 있던 영주들이나 그 휘하 장수들의 경우는 마지못해 나선 경우가 많았고 병졸들도 전쟁이 길어지면서 탈영이 늘었습니다. 김충선과 같은 왜인들은 상당히 많았다는 거지요.

병자호란때는 7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말을 달려 인조가 있던 행주산성으로 가던 중, 항복 소식을 들고 땅에 이마를 찍으며 슬피 울었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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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kr.blog.yahoo.com/shd0616/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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