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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조선시대

조선의 측천무후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

조선의 측천무후 문정왕후 결국 중종과 따로 묻히다


▲ 태릉 능상에서 바라본 전경. 앞에 솟은 관망대가 육사가 있는 곳이다.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문정왕후(1501~1565)의 태릉(泰陵)과 명종(1534~1567)의 강릉(康陵)은 통틀어 태강릉이라고 하며 아름다운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시민들의 발길이 잦다. 태강릉은 57만평이지만 이중 27만여 평에 태릉선수촌과 태릉국제종합사격장이 들어서 있다.

태릉선수촌은 태릉보다 일반에게 더 알려져 있고 더 유명하다. 이 태릉선수촌은 태릉 능역을 잠식,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도 임대료 한 푼 내지 않는 공짜다. 하기야 조선왕릉 능역을 공짜로 무단 사용하는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니 새삼 들춰봐야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문화재청은 인수과정에서 말이 많던 한국사격진흥회가 운영하는 사격장과 선수촌, 이 두 곳이 나가면 태릉을 원상복구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신만이 알 일이다.


▲ 코가 주먹만한 무인석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문정왕후를 상징하는 듯하다.

태릉(泰陵)이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전무후무한 권력을 휘둘렀던 희대의 여인 문정왕후다운 능호다.

다른 왕비의 능호는 정순왕후 사릉(思陵), 공혜왕후 순릉(順陵), 단경왕후 온릉(溫陵), 장경왕후 희릉(禧陵)에서 보듯이 여성스러운 것이 특징인데 유독 문정왕후는 클 태(泰)자를 써서 능호부터 위압감을 준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국가대표선수들이 모여 있는 선수촌이나 총소리가 나는 사격장이 들어선 것은 문정왕후의 드센 기와 발복 관계가 있나 싶다. 태릉을 다니다 보면 쿵쿵거리는 총소리가 들리고 태릉에서 마주 보이는 앞은 화랑대 육사가 자리잡고 있어 보통 터가 센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대윤, 소윤의 싸움과 을사사화

1545년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자 12살에 왕위에 오른 13대 명종은 8년 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인종이 죽자마자 중종의 계비이며 인종의 모후 장경왕후 오빠인 윤임과 문정왕후 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의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같은 파평 윤씨인 대윤(大尹) 윤임과 소윤(小尹) 윤원형 간에 벌어진 이 정국은 왕의 외척 두 윤씨가 공존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치러야 할 과정이었다.

경원대군(명종)이 태어나자 대윤은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김안로를 시켜서 문정왕후를 몰아내려 했었고 김안로에 의해 윤원형 형제는 실각했었으니 문정왕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문정왕후를 몰아내려던 김안로는 중종에게 사사 당했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은 정권을 잡았으나 인종마저 일찍 죽고 문정왕후가 정국을 틀어잡았으니 결과야 뻔한 일이었다.

조선의 4대 사화 중 하나인 을사사화는, 윤임이 인종이 죽자 봉성군(중종의 8남)을 추대하려 했다, 계림군(성종의 3남)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윤원형의 끈질긴 무고였고 소윤이 획책한 대옥사였다.

피비린내 진동한 을사사화가 벌어진 지 2년 후인 1547년 9월, 소위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난다.

양재역 벽서란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을 그대로 서서 기다리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이라는 익명의 벽서였다.


▲ 태릉은 홍살문부터 다른 능보다 훨씬 크며 석물도 거대하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을 확대시켜 윤임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주장했고 문정왕후는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명한다. 이때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결국 죽음을 당했다.

을사사화 이래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조정대신들은 100여 명에 달해 정적을 완전히 제거한 윤원형 일파는 조정을 장악했다.



문정왕후와 보우

자신의 형제로 조정을 채운 문정왕후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아들 명종이야 마마보이였으니 어머니가 무서워 벌벌 떨었고 국정은 윤원형 일파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문정왕후는 왕을 능가한 권력을 휘둘렀고 윤원형의 권세는 하늘을 찌른다.

마음대로 국정을 주무르던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사림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도첩제를 실시해 선교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에 300여개 절을 공인한다.


▲ 문정왕후 위용을 자랑하는 무인석과 문인석, 병풍석을 두른 능상 주위로 소나무가 둘러섰다.


문정왕후는 재상 정만종의 천거로 신임을 얻은 승려 보우(1509~1565)를 1548년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불교를 육성하기 시작한다. 권력을 틀어잡고 왕보다 더한 권세를 부리던 문정왕후는 불교의 힘을 빌려 내세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 어딘가 겁을 먹은 눈이 동그란 문인석은 문정왕후에게 눌려 지냈던 당시 문관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쯤 되자 성균관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고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고 언관들과 선비들도 반대하며 난리쳤으나 문정왕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선종판사로 임명되기까지 6개월 동안 양종 부활의 반대와 보우스님을 죽이라는 내용의 상소가 498회에 이르렀다.

결국 성균관 유생들은 몇 달 동안 성균관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데모까지 벌인다.

하여간 이처럼 시끄러웠던 도첩제가 실시되자 3년마다 시험을 봐서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15년 동안 다섯 번 동안 이 승과에 합격한 승려가 4천여 명에 이르렀다.

말은 정원 30명이었지만 아예 무시하고 정원의 1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벼슬아치 승려를 양산했다.

도첩제로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승려 유정과 휴정이 발탁되기도 했다.


보우에 대한 평가는 조선왕조실록은 요승(妖僧)으로 규정짓고 있으며 불교계에서는 선교 양종을 부활시킨 순교승으로 추앙해 극과 극을 달린다.




▲ 수백년 수령의 수려한 향나무들이 능침 입구에 서 있다. 향나무는 주로 왕비나 빈의 무덤에 심는다.


세상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던 문정왕후에게도 한 가지 못 이룬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중종과 나란히 잠드는 일이었다. 희릉의 장경왕후와 잠들어 있는 중종을 파내기 위해 문정왕후는 1562년 보우를 먼저 봉은사 주지로 임명했다.


▲ 능을 수호하는 무인석이 수백년 동안 문정왕후 능상에 시립해 있다.


보우가 명당이라며 천거한 성종의 선릉 옆 줄기로 이장한 중종의 정릉은 해마다 재실의 절반이 물에 잠겼고 정자각까지 물이 들어찼다.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보우가 주지로 있고 선정릉 원찰이 된 봉은사에는 승려가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침수된 재실과 정자각 보수, 복토를 위해 해마다 수만금이 소요되었으며 이 공사는 봉은사에서 맡았으니 국고는 비게 되지만 봉은사는 저절로 부자가 됐다.

보우에 대한 문정왕후의 지극한 신임은 조선조에 유래 없는 승려 병조판서까지 만들어냈다. 숭유배불 정책이 기본인 유교국가에서 승려가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어 병권을 잡은 해괴한 인사였으니 유생들의 반대와 증오는 클 수밖에.


▲ 사후의 대궐인 능상을 불밝히는 장명등도 거대해 문정왕후의 태릉 조성에 부역한 백성의 산역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백성이야 배곯아 죽건 말건 불교신심이 돈독했던 문정왕후는 1565년 회암사 중창법회를 계획한다.

그러나 정난정에게 법회 행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지만 법회가 열리기 직전인 4월 7일 조선의 측천무후 문정왕후는 65세로 돌연 사망한다.

당나라의 여황제 측천무후는 나라를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지만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권세를 휘두른 왕비였던 문정왕후는 조선을 말아 먹는 권력을 남용했다. 실제로 문정왕후 이후 왕권은 형편없이 축소됐다.

문정왕후가 죽기를 기다렸던 성난 유생들은 회암사로 몰려가 불상의 목을 자르고 절을 불질러버렸다.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명종은 어머니의 유언을 무시하고 깊은 산 절로 도망친 보우를 체포한다.

보우를 당장 처형하라는 성난 여론이 빗발쳤다. 율곡 이이는 이를 만류했고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지만 여론을 살피던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살해당했다.


▲ 가을 낙엽을 밟을 수 있는 태릉 숲은 서울 시내에서 보기드문 소나무 숲도 즐길 수 잇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의 악녀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의 가을 숲은 아름답다.

태릉에 올라서면 문정왕후의 위세를 보여주듯 거대한 문인석과 무인석이 눈에 들어온다. 3.4m 정도 되는 커다란 석상은 마치 문정왕후를 보는 듯 오만과 권세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7월 15일 자신이 잠들고 싶어 했던 중종의 곁에 묻히지 못하고 태릉에 장사지낸다. 이때 중종의 정릉도 물이 들어차는 문제가 거론돼 천장론이 나왔으나 두 번 천장 할 수 없다는 주장에 밀려 무덤에서 끌려나온 중종만 홀로 남게 됐다.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윤원형과 정난정은 부귀영화에서 죄인으로 몰락했고 유배지에서 자살한다.

친정 집안이 하루아침에 박살난 걸 보면 그렇게 국고를 퍼붓고 권세를 몰아 몰두했던 문정왕후의 불심도 부처님 보기엔 별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2005-11-03 15:2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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