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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조선시대

제7대 세조의 광릉

분수를 넘은 명당은 빼앗긴다


▲ 등산하듯 숨을 헐떡이며 올라간 세조의 광릉 능상.

광릉하면 연상하는 것이 수목원과 울창한 숲이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광릉은 제7대 세조(1417~1468)와 정희왕후(1418~1483)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늦은 오후 광릉에 도착해 능상을 올려다보자 저절로 한숨부터 나왔다. 조선 최초의 동원이강릉 광릉은 정자각을 가운데 두고 두 능상이 양옆에 높이 솟아 있었다.

광릉은 여인의 두 젖가슴 정혈에 왕과 왕비가 묻혀 있는 유두혈(乳頭穴)이라는 명당이다. 유두혈이란 대지를 어머니로 보고 그 어머니의 젖이 나오는 꼭지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한다.

정자각을 중앙에 두고 두 젖가슴 꼭지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상은 보는 순간, 등산을 할 각오로 올라가야겠다는 결심을 다질 만큼 아찔하게 높았다. 젖가슴이 여인의 상체에 있으니 높은 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엉금엉금 기어올랐던 정성왕후의 홍릉은 여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홍릉의 두 배는 너끈히 더 높은 저곳을 한 번도 아니고 세조의 능상과 정희왕후의 능상을 두 차례나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맙소사, 난 이제 죽었다'는 엄살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더구나 이곳은 완만한 경사도 아니고 가파르게 곧추세워진 언덕이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발을 땅바닥에 한 번 구른 후, 둘러맨 가방을 다시 어깨에 끌어올리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세조를 보러 올라가 보자.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에게 저곳은 너무 높지만 어쩌겠는가.



고명대신과 황표정사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어린 왕을 잘 보필해 달라는 문종의 유명을 받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 이른바 고명대신들이 정권을 장악한다.

태종이 왕비 집안을 몰살하면서 다져놓은 왕권이 흔들리고 신권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어린 왕은 즉위하자마자 어려서 잘 모르니 모든 조처는 육조와 의정부가 맡아서 하라 전권을 내줬고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할 뿐이었다. 이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했다.


▲ <조선국 세조대왕광릉 정희왕후 부좌강> (부좌강은 왼쪽 언덕에 있다는 뜻) 전서체로 쓴 비문.
이때 고명대신들은 소위 황표정치라는 것을 행한다.

황표정사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의정부에서 대신자리에 임명할 인물을 예정자의 3배를 적어 올리면서, 그 중 자신들이 임명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에 노란 점을 찍어놓으면 단종은 결재만 하는 식의 정치였다.

이 황표정사라는 낙하산 인사를 통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은 자신의 아들과 측근들을 대거 등용하였고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들은 초고속 승진을 했다.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는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의정부의 권한은 막강했다.

이들의 인사권 전횡으로 지나치게 권력이 증대하자 집현전 학사들과 사헌부의 반발을 불러왔다. 조정이나 왕의 종친 사이에서는 왕숙 섭정론이 일기 시작했다.

승정원과 손잡고 어린 왕을 주무르던 김종서와 황보인은 자신들을 도와줄 대상으로 막강한 수양보다 온건파인 안평대군을 끌어들인다.

실상 문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황표정사라는 것도 이미 문종 때부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자들의 압력으로 행해지던 파행적인 정치행각이었다.

문종은 형제들의 세력 확장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고명대신과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어린 단종을 간절하게 부탁했던 것이다.

왕실에서도 어린 왕이 고명대신들에게 놀아나는 꼴을 보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종실의 수장격인 양녕대군은 수양대군 편에 섰고 후에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키다 발각되자 그의 처벌에 동의했다.

왕자들의 세력과 고명대신들의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 신경전이 오가는 그때, 마침내 집현전 학사 권남과 신숙주, 한명회를 끌어들인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궁궐의 제2문에서 철여의라는 쇠뭉치로 때려죽이고 정권을 틀어쥔다.

1452년 5월 18일 즉위한 단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이 지난 때였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역모를 획책하여 그들을 제거했다고 고한다.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경쟁자였던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가 교동으로 옮겨 사사한다.


▲ 석물은 조선 전기양식이며 특이하게 망주석이 능상 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

수양대군과 고명대신, 왕자들의 싸움은 수양대군의 승리로 끝났고 이때 한명회와 신숙주 등 공신들이 훈구세력이 된다.

그러나 집안의 자손이 많으면 쉽게 망하지 않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왕을 도와주는 것은 왕실의 종친들이다. 왕자들이 많을 때는 신권을 누르고 왕권이 안정될 수 있었다.

이들 훈구세력은 왕실의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다.

왕실의 외손인 남이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외숙인 세조의 총애를 받고 급부상하자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한명회 등 훈구세력들은 남이를 비롯한 신진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역모사건을 꾸며내고 처형시켜 버린다.

정치와 권력이란 중독성이 있으며 한 번 맛본 자는 영원히 대대손손 그 영화를 누리길 바란다. 조선 전기 세조의 즉위과정과 그 후 주위에서 벌어지는 정치 사건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정략과 모략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분수를 넘은 명당은 빼앗긴다

1468년 9월 8일 세조가 54세로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왕릉 택지에 들어간다.

광릉은 정흠지 집안의 선산이었다. 예종이 친히 거동하여 산세를 살핀 후 광릉 택지로 결정되자 정흠지 묘와 선산을 송두리째 이장 당한다. 정흠지 아들은 정창손으로 세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좌익공신이었지만 왕릉으로 결정되니 도리 없이 조상의 묘 8기를 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예종은 졸지에 선산을 모조리 이장당하게 된 정창손에게 관곽 8개와 유둔(기름먹인 천막) 8개, 종이 100권, 쌀과 콩 1백 가마를 내려주고 위로했지만 선산을 빼앗긴 정창손에게 위로가 될 리 없었다.

이때 정흠지 묘 밑에 있는 유군의 선산 유견의 묘도 함께 이장 당한다. 난다긴다 하는 현직 공신의 묘도 왕릉으로 택지 되면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이 때문에 명당의 임자는 따로 있다는 말이 나왔다.


▲ 세조의 능상에서 내려다 보면 군사가 도열한 듯한 나무와 밀고 들어오는 앞산은 군대가 출정을 앞두고 진을 친 듯한 긴장감이 돈다.

11월 24일 축시에 발인한 세조의 국장은 28일 축시에 광릉에 장사지냈고 광릉 산릉에 부역한 군사는 9천명이었다.

'내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유명대로 세조는 조선 최초로 회곽을 쓰게 되며 왕과 왕비 두 무덤에 정자가 하나를 쓰는 '동원이강릉'이 탄생한다. 속히 썩어서 뼈가 땅의 생기를 받아야 후손에게 발복된다는 풍수 때문이었다.



세조는 어떻게 생겼을까?

세조의 능에 올라 고소공포증을 누르고 앞을 내려다보니 마치 군사들이 포진한 듯한 산세와 나무가 한눈에 들어와 과연 세조답다는 느낌을 준다.

세종의 영릉은 넓게 펼쳐 있어 인자하고 포근한 산세가 관용과 편안함을 갖고 있다면, 광릉은 빼어났지만 나무들조차 군사들이 앞까지 밀려들어 대오를 짓고 있는 듯한 긴장감이 돈다.

"저 산세와 나무들을 좀 봐요. 마치 무장한 군사들이 밀고 들어오는 거 같지 않아요?"

"그렇군요."

▲ 단아하고 단정한 선비의 얼굴을 가진 문인석.
동행한 창경궁 지킴이 전정임씨도 동의했다. 풍수를 잘 몰라도 사람이 보는 눈과 느낌은 동일하다.

습관대로 무인석과 문인석을 올려다보다가 놀랐다.
수백 년 전에 죽은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인상인지 알 도리는 없다.

왕릉 답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은 그 주인공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무인석과 문인석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당대 최고의 장인의 손끝에 탄생한 무인석과 문인석은 예술가인 그들의 눈썰미에서 그 시대 왕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라는 판단이다.

내가 조선왕릉을 답사할 때 석물 중 다른 어떤 것보다 반드시 무인석과 문인석을 자세히 살펴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세조의 문인석은 단정한 선비의 인격을 연상케 했다. 무인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아하고 단정한 얼굴에 작은 입을 꼭 다문 선비. 두 쌍의 무인석과 문인석의 얼굴은 기본 틀인 '단정한 모범생 얼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 기자의 부탁으로 창덕궁 지킴이 진정임씨가 무인석 높이를 가늠해봤다. 무인석 역시 문인석과 다를 바 없이 단정한 인상이다.

흐음, 선공감 장인이 본 세조는 저렇게 생겼던가?

호방한 무인 기질의 호랑이 기상을 품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을 왔다갔다하며 올려다봐도 상상했던 세조, 계유정란을 일으켜 형제와 조카를 죽인 무서운 무인풍 왕의 얼굴은 아니었다.

의문을 남겨둔 채 옆에 있는 정희왕후의 능으로 향했다. 다시 내려가서 올라갈 겁을 먹었던 것과는 달리 두 능 사이에 연결되는 산책길이 있어 곧장 정희왕후 능으로 갈 수 있었다.


▲ 정희왕후 능의 무인석은 여걸답게 호방한 기상을 품고 있다.

성종 14년(1483) 66세로 죽은 정희왕후의 능에 들어섰다.

정희왕후는 옷을 손수 세탁해서 입었고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했으며 과감하게 맏손자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둘째아들(성종)을 왕위에 앉히는 결단을 내렸던 여걸이다.

정희왕후는 수의조차 무명으로 미리 장만해두고 그것을 쓸 것을 유언해 비단 수의도 입히지 않았다. 정희왕후 능의 무인석은 세조의 단아한 선비 같은 무인석과는 달리 여걸다운 성품대로 호방했다.


▲ 정희왕후 능 망주석도 곡장에서 깊숙이 들어와 세워졌다.

내려다보면 고소공포증이 왈칵 몰려오는 높은 능상에 서서, 밀려드는 성난 군대 같은 위용을 뽐내는 빽빽한 전나무와 산세를 바라보노라니 왕릉은 왕의 성품을 닮는다는 말이 실감나긴 했지만 세조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2005-10-30 15:3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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